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복궁/건축물 (문단 편집) == 이건되어 잔존하는 건축물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희정당 본채.png|width=100%]]}}} ||'''[[경복궁 강녕전|강녕전(康寧殿)]]'''[br] 1917년 11월에 [[창덕궁 희정당]]이 대화재로 소실되자, 1920년에 복원하면서 강녕전을 헐어다 세웠다. 강녕전 모습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고, 원래는 없던 용마루를 시멘트로 올리고 트여 있던 툇간에 문을 달았으며, 창호지를 없애고 유리창을 끼우고 내부를 서양식으로 단장하는 등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대조전1.png|width=100%]]}}} ||'''[[경복궁 교태전|교태전(交泰殿)]]'''[br]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대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대조전]]을 복원하기 위해 1920년에 이건하였으며, 상당한 변형이 가해졌다. 대청을 거실로 삼고 거실 천장에 샹들리에가 설치되었으며 원래 우물마루였던 대청 바닥이 쪽널마루로 바뀌는 등 서양식으로 개조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창덕궁 경훈각.png|width=100%]]}}} ||'''[[경복궁 만경전|만경전(萬慶殿)]]'''[br][[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로 [[경복궁 자경전|자경전]]의 북쪽에 있었다.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1868년 중건할 때 자경전의 중소침으로 지어졌다. 고종 대에 두 차례에 걸쳐 발생한 대화재 이후 한동안 고종이 [[경복궁 강녕전|강녕전]]을 대신하는 정침으로 사용하였다. [[신정왕후 조씨|신정왕후]]의 팔순 진찬례가 열리기도 했고, [[외국]] [[공사]]를 접견하기도 했다. 1917년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내전 영역을 복구할 때 [[창덕궁 경훈각|경훈각]]으로 변하여 현재까지 [[창덕궁]]에 남아 있다. 2차 복원 공사 4단계(2031~2042)에 복원될 예정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donga.com/-19057_0.20271100.jpg|width=100%]]}}} ||'''[[창덕궁 신선원전#s-4.4|문경전(文慶殿)]]'''[br]왕이나 왕비의 장사를 마치고 종묘에 입향할 때까지 신위를 모시는 혼전(魂殿)이었다. 고종초에 중건되어 1890년 신정왕후의 국장 때 신주를 모시는 용도로 사용했다. 서쪽에 붙어 있는 회안전(會安殿)과 함께 태원전의 부속 전각으로서 기능했다. 1904년 순명효황후의 국장을 치르면서 회안전과 함께 [[덕수궁|경운궁]] [[덕수궁 선원전|선원전]] 권역으로 이건되어 이름이 의효전(懿孝殿)으로 바뀌었는데, 이후 [[창덕궁]] [[창덕궁 신선원전|신선원전]] 권역으로 다시 옮겨지면서 현재까지 창덕궁 의효전으로 남아 있다. 2차 복원 공사 4단계(2031~2042)에 복원될 예정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덕수궁 함녕전.jpg|width=100%]]}}} ||'''[[덕수궁 함녕전|만화당(萬和堂)]]'''[br] 만경전 북쪽에 있던 건물로 아관파천 이후 경운궁으로 이건되어 함녕전으로 남아있다.[* 다만 현재 건물은 1904년(광무 8년)에 화재로 탄걸 1906년(광무 10년)에 재건할때 변형이 가해졌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크기변환_1E6A0589.jpg|width=100%]]}}} ||'''[[경복궁 북원#s-4.1|융문당(隆文堂)]]'''[br]원래 신무문 밖 후원지역에 있었으나 현재는 [[전라남도]] [[영광군]] 영산성지(靈山聖地)로 옮겨져 있다. 이익공 형식의 공포에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하여 권위를 높였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대청이 3칸이고 양 옆에 방이 있다. 단 차이가 있는 넓은 월대를 갖추고 있으며 하대(下臺)의 넓고 큰 계단 아래에 하마석(下馬石)이 있었다. 국왕이 직접 감독하는 문전시(文殿試)나 망배례(望拜禮), 계회(契會)나 연회가 있을 때 사용했으며 군영의 사열식을 열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376029_28750_170.jpg|width=100%]]}}} ||'''[[경복궁 북원#s-4.2|융무당(隆武堂)]]'''[br]융문당과 함께 [[전라남도]] [[영광군]]으로 옮겨져 있다.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중앙에 대청 2칸, 좌우에 방이 1칸씩 있고 전·후퇴가 있는 구조이다. 공포는 물익공이고 지붕마루에 양상도회(樑上塗灰)를 했다. 전면에 넓은 월대가 있으나 건물의 규모와 월대 높이, 익공 형식 등은 융문당보다 규모가 작다. 무전시(武殿試)가 있을 때 사용했으며 국왕이 시사(試射)를 하거나 군사들의 연무(鍊武)를 행하기도 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0416_가와구치코_(233).jpg|width=100%]]}}} ||'''월궁전(月宮殿)?''' '''무량수각(無量壽閣)?'''[br][[일본]] [[가나가와현]] [[가마쿠라시]] 소재의 고토쿠인(高徳院)에 경복궁의 건물이라고 전해지는 간게츠도(観月堂)가 존재한다. 조선왕실에서 금융담보로 조선척식은행에 제공한 것을, 야마이치(山一) 증권의 설립자 스기노 기세이(杉野喜精)의 저택으로 옮겼다가 1924년 고도쿠인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신미년 봄 정학교(丁學敎)가 썼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학교는 광화문 현판을 쓴 조선 후기의 명필로, 1871년경 현판을 썼으리라 추정된다. 무량수각이라는 이름 때문에 경복궁 내 명성황후의 원당(願堂)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북궐도형, 궁궐지, 경복궁배치도 등 관련 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건축물이고[* 정조가 궁궐 내 원당 설립을 금지했던 일 때문에 그림에서 나타내지 않았다는 해석이 있는데 민간신앙의 공간인 신당(神堂)이 북궐도형과 동궐도형 곳곳에 묘사되어 있는 것을 감안했을 때 이해하기 어렵다. 또한 북궐도형은 [[대한제국]] 말 일제가 경복궁 전각 및 재산의 효율적인 처분과 관리, 그리고 왕실 감시와 경호를 위해 주문하여 매우 상세하게 작성한 것이라고 추정된다. [[https://blog.naver.com/minsu977/221083133820|#]] 따라서 원당 건물이라고 하여 도면에서 누락했을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 일각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월궁전(月宮殿)이라는 이름 역시 확인되지 않아 경복궁의 전각이 맞는지조차 확인이 어렵다. 정면 3칸, 측면 2칸[* 한 칸은 툇간이고 한 칸만이 방(房)이다.]의 아담한 전각인데 경복궁배치도 및 북궐도형에 묘사된 바에 따르면 이러한 건물은 면복각(冕服閣), 수문장청(守門將廳), 문경전 재실(齋室) 등 몇 되지 않으므로 이러한 전각들 위주로 고찰해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현재는 시멘트와 유리창이 발라져 있어 훼손 및 변형이 심하다. 2010년 간게츠도를 한국으로 반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2022년 현재는 흐지부지되어 소식이 없는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