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복궁/건축물 (문단 편집) == 소실된 미복원 건축물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서십자각 원형.png|width=100%]]}}} ||'''[[경복궁 서십자각|서십자각(西十字閣)]]'''[br]1395년([[태조(조선)|태조]] 4년)에 [[경복궁]]을 처음 지으면서 같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1427년([[세종(조선)|세종]] 9년)에 심하게 기울어져 철거했고 이후 관련 기록은 없으나,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중요한 건물인 만큼 머지않아 재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대한제국)|고종]] 초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복구했다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초반에 [[서울 전차|전차]] 통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제가 다시 헐었다. [[1990년대]]에 [[문화재청|문화재관리국]]에서 경복궁 복원사업을 진행하면서 서십자각을 복원 계획하려 했지만 교통 문제가 있어 현재까지 복원하지 못했고 2차 복원 공사 5단계(2042~2045)에 복원될 예정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숭양문.jpg|width=100%]]}}} ||'''[[경복궁 숭양문|숭양문(崇陽門)]]'''[br]수정전을 처음 세운 1867년(고종 4년)에 같이 지어졌다. 수정전은 건물도 크고 궐내각사와 내전이 만나는 영역에 있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곳으로 받아들여져 부속 건물들과 영역의 격이 다른 곳과는 사뭇 달랐다. 그 일환으로 남쪽에 무려 3중의 행각을 두었는데 수정전 기준으로 바로 남쪽에 수정문, 그리고 그 남쪽에 영화문, 제일 바깥쪽에 숭양문(崇陽門)을 세웠으며 이 중 숭양문이 가장 규모가 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대부분의 부속 건물, 행각들과 함께 철거되었고 지금은 수정전 건물 한 채만 남아있다. 2차 복원사업때 복원될 예정이었으나 행각 내부자료 부족으로 무산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선전관청.jpg|width=100%]]}}} ||'''선전관청(宣傳官廳)'''[br]무관들이 근무하면서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곳이다. 일제 강점기 시절까진 벽체가 변형된 상태로 남있었으나 도중에 훼철당하고 없다. 2차 복원사업때 복원될 예정이었으나... 하필 아래에 [[국립고궁박물관]]의 지하 기계실이 있어서 취소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선원전.png|width=100%]]}}} ||'''[[경복궁 선원전|선원전(璿源殿)]]'''[br]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1868년 창건된 이후 [[창덕궁 선원전]]의 [[어진]]을 경복궁으로 옮겼다. 선원전이 두 곳으로 늘어나면서 [[고종(대한제국)|고종]]이 경복궁에 머물 땐 경복궁으로, [[창덕궁]]에 머물 땐 창덕궁으로 [[어진]]도 함께 옮겼다.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을 훼철하면서, 1931년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박문사]]를 [[장충단공원|장충단]]에 짓고 선원전 본채를 옮겨다 고리(庫裡)로 사용하다 1945년 11월 23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2차 복원 공사 4단계(2031~2042)에 복원될 예정이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안당.png|width=100%]]}}} ||'''[[경복궁 선원전|경안당(敬安堂)]]'''[br]선원전에 딸린 부속건물로, 1966년까지도 살아남았으나 문화재에 대한 인식 자체가 상당히 낮았던 당시 국립민속박물관 건립을 위하여 대한민국 정부의 손에 의해 철거되고 말았다. 경안당의 자재는 일부가 1978년 [[향원정]]의 보수에 쓰인 것으로 확인된다.선원전과 마찬가지로 2차 복원 공사 4단계(2031~2042)에 복원될 예정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오위도총부.jpg|width=100%]]}}} ||'''[[오위|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br]조선 전기 중앙군인 [[오위]]를 통솔했던 청사로 조선 후기로 가면서 유명무실한 기관이 되었다. 사진자료가 남아있다보니 2차 복원 공사 2단계(2019~2026)에 복원될 예정이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육우정.jpg|width=100%]]}}} ||'''육우정(六隅亭)'''[br]경복궁 북쪽 서녹산에 있던 정자로, 을미사변 이후로 철거되고 없다. 2차 복원사업때 복원될 예정이었지만 취소되었다. 정황상 복원 중요성이 떨어지고 유구를 찾아 복원하기 어려워서 그런듯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관문각.jpg|width=100%]]}}} ||'''[[경복궁 건청궁#s-3.3|건청궁 관문각(觀文閣)]]'''[br]1888년(고종 25) 경복궁 건청궁 영역에 건립되었던 유럽식 2층 건물로 원래는 건청궁이 지어질 때 단층 한옥 건물로 관문당으로 불리다가 관문각으로 개칭했으며, 1888년 우크라이나 건축가인 사바틴의 설계하에 유럽식 2층 건물로 준공되었다. 고종이 관문각에 거처한 내용은 보이지 않으며, 창덕궁의 주합루(宙合樓)에 보관하던 대전의 계유년 옥책(玉冊)과 옥보(玉寶), 대왕대비전의 계미년 옥책과 기묘년 옥보, 중궁전의 병인년 교명(敎命)과 옥책·금보(金寶) 및 계유년 옥책, 세자궁의 을해년 교명과 죽책(竹冊) 등을 옮겨와 봉안하고 있었다. 또한 어진도 보관하였는데, 1897년(광무 1) 6월 15일자 관보에 경복궁 내 어진 장소로 관문각이 거론되었다. [[을미사변]] 당시 사바틴과 미국인 다이 대령이 관문각 2층에서 을미사변을 목격했고, 이후 경복궁이 버려지면서 관문각도 같이 버려지다가 1901년 훼철된 것으로 보인다. 관련 도면 등이 현재 존재하지 않고 있기에 건청궁이 복원될 때 같이 복원되지 못했다. 참고로 2층 양관으로 준공되면서 사진에서 보다시피 2층 창문이 깨지는 등의 실무자들의 부실 시공으로 인해 훼철될 때까지 수 없이 보수 공사를 해야 했으며, 이것이 훼철의 원인으로 보인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경복궁 시계탑.jpg|width=100%]]}}} ||'''[[경복궁 시계탑]](時計塔)'''[br]경복궁 집옥재 남쪽에 위치한 시계탑으로, 1887년 무렵에 우리나라 최초로 설치된 시계탑이다. 설계자는 관문각을 지은 우크라이나 건축가인 사바틴이며 북궐도형에는 종각으로 표시되어 있는데 날씨가 좋지 않을때에 시간을 알리기 위해 위에 종을 설치했기 때문이다. 이후 관문각과 같이 훼철되었으며 관문각처럼 도면이 나타나지 않으면 복원될수 없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105922233_Ptv8AxU4_2.jpg|width=100%]]}}} ||'''[[경복궁 북원#s-6|경농재(慶農齋)]]'''[br]궁궐 안에서 한 해 농사의 풍흉을 가늠하고 농삿일의 노고를 직접 체험하는 '관경(觀耕)'을 행하기 위한 곳이었다. 관풍루(觀豊樓)와 대유헌(大有軒) 등 부속 전각이 딸려 있어 궁궐 내부에 조성한 논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하였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은 경복궁 대화재 이후 경농재를 편전(便殿)처럼 사용했다. 1939년 총독 관저 신축 사업의 일환으로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