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북고등학교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20160511_185518002.jpg|width=100%]] 경북고등학교의 전신인 사립 달성학교는 '''영남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서 1899년 최극창, 윤필오 등 10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대구의 여러 유지들이 모금에 참여한 사립학교로 경상감영 자리에 문을 열었다. 조선인 자제들에게 일본어로 선진 학문예술을 가르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히자츠게 마스키치(膝付益吉)는 한일친교를 증진시키고, 상호간의 오해를 푸는 것은 교육 외에는 없다는 것을 간파한 뒤, 자신의 직업을 포기하고 학교의 창립에 전력을 쏟았다. 1899년 7월, 히자츠케를 도와서 함께 학교를 위해 힘쓴 사람으로 신타니마츠스케(新谷松助)도 있었다. 대구의 명사 윤필오(尹弼五)씨도 앞장서서 이를 응원하며, 관찰사 김직현(金稷鉉)씨를 움직여, 창립비(創立费) 중 백원을 기부하게 하고, 700여평의 학교 부지와 관사 1동을 할애 받았다. 달성학교가 기반을 이루자 조선인 유지들이 금품을 기부하는 것이 많아져 그 금액이 700원을 넘어서, 학교의 기초가 정해진다. 교사를 초빙하여 오래도록 이를 유지하는 방법에 고민하던 히자츠케는 스스로 본인재산 일체를 처분해 교비로 제공하자, 그 뜻을 듣게된 한국학부(韓國學部)에서 1900년부터 연간 120원을 지원하고, 부산의 다섯군데 사찰에서 매월 15원씩 기증했다. 또한 1901년 4월부터 동아동문회(東亞同文會)는 해마다 420원의 보조금을 주기에 이르렀으며, 부산의 일본영사관에서도 보조를 얻어서 부산사찰의 보조는 1901년 4월부터 중지 되었다. 기타 목포지역의 유지와, 한남교육장려회(韓南敎育奬勵會)에서도 가부금을 보냈고, 1901년 9월에는 경부철도회사(京釜鐵道會社)로부터도 기부금이 있었다.이로써 달성학교는 대구유지 소수가 좌지우지 할 수 없는 명실상부한 한강이남의 교육기관이 되었다. 심상과와 고등과를 둔 달성학교는 4년제 교육기관으로 뒤에 심상과는 대구공립소학교[* 현 대구초등학교]로 인계되었고, 고등과는 1907년 개교한 협성학교[* 대구 국채보상운동 모금액 중 일부가 설립 자금에 쓰였다.]에 흡수되었다. 이후 일제는 협성학교를 관립 대구고등보통학교에 병합하고, 대구고등보통학교는 협성학교의 재학생과 물품을 인수하여 1916년 개교했다.[* 2015년까지 경북고등학교는 달성학교가 전신이라는 사실을 몰랐으므로 대구고보의 개교년도를 개교기준으로 삼았었다. 그러나 2016년 대구고보 개교 100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하다가 달성학교가 효시였음을 알 수 있는 고문서를 발견하였고, 2017년에 개교년도를 1916년에서 1899년으로 앞당겼다.] 그 뒤 대구공립고등보통학교(1925), 경북공립중학교(1938), 대구고등학교(1950.5), 경북고등학교(1950.6), 대구고등학교(1951)를 교명으로 쓰다가 경북고등학교(1953.9)로 교명을 변경한 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으며 2016년 2월 대구고보 기준으로 5076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경북고등학교는 [[경기고등학교]][* 1900년 관립중학교로 개교], [[평양제이중학교]](폐교)[* 1909년 관립평양고등학교로 개교, 1911년 평양고등보통학교로 교명 변경. 이후 평양제이중학교로 개명. 6.25 전쟁 이후 폐교된 것으로 추정됨.]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3번째로 설립된 공립고등학교(제3고)'''[* 폐교된 평양제이중학교를 제외하면 두 번째다.]이며 이는 교표, 교복 소매의 삼선으로 표현되어 있다. 단 1899년 7월에 개교한 사립 달성학교가 전신이므로 학교역사는 경기고나 평양제이중보다 길다. || [[파일:경성제일고보 마크.gif|width=100%]] || [[파일:평양고보 교기.png|width=100%]] || || 경성제일고보(現 경기고) 교표 || 평양고보(舊 평양제2중학교) 교표 || 1919년 [[3.1 운동]] 당시(대구는 3월 8일) 대구고보 전교생 239명 중 200여 명이 참가하여 대구 만세운동을 주동한 데 이어 항일동맹휴학ㆍ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 발표사건ㆍ비밀결사사건 등 민족정기를 밝히는 항쟁이 여러 차례 있었다. 이외에도 여러 항일 운동에 앞장섰고, 확인된 항일투쟁가만 38명이다(서훈자 33명, 미서훈자 5명).[[http://m.yeongnam.com/jsp/view.jsp?nkey=20160815.010040717460001|관련 기사]]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나라를 지키기 위해 경북중 32~34회 학생들이 학도의용군에 지원하여, 안타깝게 전사한 학도병이 53명에 이른다. 특히 1945년에 입학한 32회는 동기생 20여 명을 잃었다. 이는 대구경북지역 중학교 중에서 가장 많은 희생이었고, 전국에서도 두 번째로 많은 학교로 꼽힌다. 이 학도병을 기리는 조형물이 2.28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옆 호국동산이라는 이름의 공원에 세워져 있다. 1960년 '''[[2.28 학생민주의거]]의 발상지'''다. 당시 이대우 학생회장의 주도로 여러 학교와 연합하여 일으킨 이 운동은 대한민국 최초의 학생 자발적 운동이며,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 민주의거를 기념하는 기념비와 기념 조형물이 교정에 세워져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