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부 (문단 편집) === 철도 === [[19세기]] 말엽부터 [[한성]]을 중심으로 놓이기 시작한 전국의 철도망은 일제강점기에 들어 거의 그 완성을 보게 되었고, 현대까지도 서울 간선철도망은 이때 완성된 것에서 큰 변화가 없다. 많이들 착각하는 것이, [[경인선]]이나 [[경부선]] 같은 노선명이 일제의 잔재라고 하는데 사실은 '''경'''성-'''인'''천, '''경'''성-'''부'''산이 아니라 그냥 수도를 뜻하는 서울 [[京]] 자에서 따온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착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한참 뒤인 [[2016년]]에 [[경강선]]이 개통되었을 때도 이름을 듣고 반발이 상당히 많았었다. 정작 경인선이나 경부선은 당시 서울의 이름이 한성부였음에도 불구하고 노선명이 한인선이나 한부선으로 지어지지 않았다. 경인선과 경부선, [[경의선]]은 경성부 출범 이전부터 개통되어 있었고, 경성부 외곽을 한 바퀴 도는 [[경원선]]은 경성부 출범 이듬해인 [[1911년]]에 개통되었다. 본래 경의선은 시점이 [[용산역]]이었기 때문에 경부선과도 용산역에서 연결되도록 만들어졌으나, 경성부민들의 편의를 위하여 [[1919년]]에 [[신촌역(경의선)|신촌역]]을 경유하여 [[서울역]]으로 들어오는 새로운 선로가 지어졌고, 기존선은 [[용산선]]이 되었다. 본래는 [[서대문역(폐역)]]이 경성역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경성의 중앙역 노릇을 했으나 경의선이 연장되면서 경성의 중앙역 역할을 남대문역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1923년]]에 남대문역이 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고 [[1925년]]에는 본래의 역 건물을 헐고 지금의 [[문화역서울284|서울역 구 역사]]에서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즈음의 경성역은 [[한반도]]의 중간 기착지로서, [[선양시]], [[창춘시]]로 향하는 국제열차가 운행했다. [[1939년]]에는 [[경춘선]]과 [[중앙선]]이 개통되며 [[청량리역]]이 동부 경성의 관문이 되었고, 동경성역으로 이름이 바뀌며 중요도가 늘었다. 이 시기에 전국의 철도망이 경성으로 연결되며 상경하는 사람도 확연히 늘어나게 되었고, 경성의 거대화를 더욱 가속화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42년]]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며 일제는 만성 물자부족에 시달리게 되었고, [[1944년]]에는 아예 철길과 역 건물까지 뜯어가게 되면서 역들이 무더기로 폐역을 당하게 된다. 이때 폐역을 당한 곳들은 광복 후인 [[1974년]]부터 지하철 시대가 시작되며 어느 정도 부활했지만, 끝내 부활하지 못 한 역들도 있다. 시내 궤도교통으로는 [[경성전차]]와 [[경성궤도]]가 있었다. 경성전차는 해방 후에도 서울전차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왕성하게 운행하다가 [[1968년]]에 '불도저 시장' [[김현옥]] 서울시장이 폐선을 단행해 역사로 사라졌다. 그러나 그 당시의 노선들은 대부분 [[서울 지하철]]을 건설할 때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흥인지문|동대문]]에서 [[왕십리]]를 거쳐 [[광장동]]으로 향하던 경성궤도는 끝내 사라져 흔적을 감추고 말았다. 기존 간선철도망을 이용하여 운행하던 [[경성순환노선]]이라는 것도 있었다. [[경의선]]과 [[용산선]]을 따라 [[서울역]] - [[용산역]] - [[신촌역(경의선)|신촌역]]을 거쳐 경성 서부를 한 바퀴 도는 노선이었는데, 이것도 1944년 물자공출로 인해 그대로 사라지고 말았다. 한편, 1930년대에는 최초의 서울 지하철 계획이 나오기도 했는데, 지금의 [[서울 지하철 1호선]]과 선형이 유사했다.[[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122300209202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9-12-23&officeId=00020&pageNo=2&printNo=6589&publishType=00020|#]] 크게 종로를 지하로 통과하는 안과, 아예 [[청계천]] 물을 막고 복개하여 그 밑에 지하철이 다니게 하는 기상천외한 안도 존재했으나, 이 또한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계획으로 남았다가 30년이 흐른 1960년대에나 가서 다시 논의되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1974년 개통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