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부 (문단 편집) === 주거 환경 === 구한말부터 남촌 일대에 일본인들이 들어와 살게 되면서 일본식 주택과 문화주택(文化住宅)이라 불리던 서양식 주택이 경성에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이에 한옥은 감소하던 추세였다. 이에 경성에 살던 [[정세권]]이라는 사업가는 [[북촌]]과 [[서촌]] 일대에 남아 있던 99칸 저택들과 [[조선왕조]]의 별궁이었던 [[누동궁]] 등을 매입하여 서민들을 위한 소형 한옥으로 개조하는데, 이것이 바로 '조선집'이라는 건축 양식이다. 현재의 [[북촌한옥마을]]이나 [[익선동 한옥마을]]이 당시 조선집 양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1930년대에 들어 전국의 도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시가지를 재개발하고 근교에 새로운 택지지구를 마련하는 '[[토지구획정리사업]]'을 발표한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은,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온 좁고 난잡한 도시의 구획을 정리함과 동시에 제반시설을 위한 용지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경성에서는 시범적으로 [[무교동]], [[장사동]] 등의 지역이 재개발에 착수하였고, 새로 [[돈암지구]], [[영등포지구]], [[대현지구]], [[한남지구]] 등이 조성되었다. 이 구역들은 재개발과 재건축을 거듭하며 현재로서는 당시 모습이 모두 사라졌으나, 도로망 자체는 당시에 지어진 그대로 이어지고 있으므로 현대 서울의 틀을 다진 사업이라 하겠다. 이후 [[용두지구|용두]], [[사근지구|사근]], [[번대방지구|번대방]], [[청량리지구|청량리]], [[신당지구|신당]], [[공덕지구|공덕]]의 6개 지구가 추가로 지정되어 삽을 떴으나 본격적인 공사는 시작도 못 하고 [[태평양전쟁]]으로 인해 잠정 중단되었으며, 이 사업들은 모두 [[대한민국 정부]]와 [[서울특별시청]]이 떠안았다. 해방 이후에도 [[6.25 전쟁]] 등의 일을 겪으며 사업을 마무리 짓지 못 하다가, 서울 환도 이후 [[대한민국 제1공화국|제1공화국]] 때 서울을 복구하기 위하여 삽을 떴고, 이 사업들은 삽을 뜬지 거의 30년 만인 [[1960년대]]에 가서 그 끝을 보게 되었다. 이런가 하면 도시 빈민 문제도 심각했다. 총독부가 용산의 일본인 부촌이나 병참기지화 발표 이후 영등포 일대에 공장 인프라를 구축한 것과 반대로 동대문 지역의 조선인 주거지는 외면 받기 일수 였다. 독립 이전까지 경성내 조선인 중 상하수도를 이용할수 있는 인구는 전체의 30%도 안되었고 대다수는 재래식 빨래터나 우물을 이용하였다. 특히 [[토막민]]이라고 해서 도시에서나 밀려나 흙으로 만든 움집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가히 [[신석기 시대]] 수준의 생활이었던 것이다. 이런 토막촌은 당시 고시정(현 [[후암동]])과 [[도화동(서울)|도화정]], [[신당동(서울)|신당리]], [[북아현동|북아현리]] 등에 형성되어 있었고, 1940년 말 경성부 사회과 자료에 의하면, 공식적인 토막민의 숫자는 1만 6,344명, 비공식적으로는 3만 6,000여 명에 이르렀다. 토막민이 계속 증가해서 경성부는 교외지역인 [[홍제동|홍제정]]·[[돈암동|돈암정]]·아현정 등에 토막 수용지를 설정해 부내에 산재하는 토막민을 수용했으며, 이는 이후 [[달동네]]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