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성제국대학 (문단 편집) ==== 교수 ==== 후발 [[제국대학]]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도쿄제국대학]] 출신 신진학자들이 다수 부임한 경성제국대학의 교수진은 특히 절대 다수가 도쿄제대 출신이었으며, 모교 학부 출신으로 경성제대 교수로 임명된 졸업생은 예과 2회 출신 일본인 1명뿐이었을 정도로 도쿄 중심성이 강렬했다. * 일본인 교수 * [[오구라 신페이]](小倉進平, 1882~1944): 왠지 '소창진평'이라는 한국식 음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고대 일본어 및 한국어를 전공한 언어학자. [[만요가나]]와 [[이두]]의 유사성에 착안하여 역사상 최초로 [[향가]] 해석의 시도를 완료한 사람인데, 문제점들이 많이 지적되어 [[양주동]]이 크게 뜯어고쳤다. 그리고 또 한국어 [[사투리]]를 최초로 체계적으로 연구하기도 했다. *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2~1935): [[도쿄대학|도쿄제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하였으며, 경성제대 사학과 교수와 [[교토대학|교토제대]] 사학과 교수를 겸임하였고 [[조선총독부]] 부설 조선사편찬위원회(1922) 및 조선사편수회(1925)에서 편찬위원/편수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국 고대사(주로 신라사)를 연구하여 여러 연구 논저를 내놓았고, 조선에 대하여 큰 애착심을 가져서 자신의 아들 중 하나에게는 [[김춘추]]의 이름을 따서 짓기도 하였고 장례식 역시 조선의 전통 장례 방식으로 치룰 정도였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는 [[단군]]에 대해서 역사가 아닌 신화로 보며 부정했고 또 [[삼국사기]] 초기기록에 대해서도 연대가 일부 앞당겨 졌다고 보았고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도 긍정했다.[* 임나일본부설에 대해서는 현재 사학계 대다수에 의해 부정되고 있는 이론이다.] 한편 이마니시는 당대에 이나바 이와키치(稲葉岩吉) 등을 위시로 한 만선사관(滿鮮史觀)론자들과 달리[* 이들은 [[고구려]]를 [[한국사|조선사]]에서 분리시켜 [[만주/역사|만주사]]로 분류하였다.], [[고구려]]를 한국사로 보았다. * [[모리 다메조]] * [[다카하시 토오루]] * [[하나무라 요시키]] * 조선인 교수[* 경성제대의 교수진은 거의 일본인이었고 조선인은 대부분 강사나 조수로 근무하였는데 정식으로 교수로 임명된 조선인은 전 기간을 통틀어 단 4명에 불과하고 재임 기간도 매우 짧다. 조선총독부관보와 경성제국대학일람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일람에는 본적지도 나와 있어 창씨개명을 했어도 조선인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 [[윤일선]](尹日善): [[교토대학|교토제국대학]]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병리학]]자이며 [[서울대학교/임원|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1928년 3월 30일 ~ 1929년 4월 18일 재임. 경성제국대학 조 교수(조선총독부관보제377호)서임. * 고영순(高永珣): [[오사카대학|오사카 의과대학]]을 나왔다. 경성제대 의학부 강사로 있던 중 1928년 12월 24일 ~ 26일 조교수로 재임. 이후 서울 정동에서 내과의원을 개업하여 운영했다.[* 그런데 조교수로 임명되기 전인 12월 12일 ~ 14일 사이에 개업을 알리는 인사(人事), 광고, 기사가 올라온 것을 보면 거취에 대해 모종의 우여곡절 있었던 듯 하다.] 임명재[* 경성의학전문학교 졸업, [[홋카이도대학]] 의학박사], 심호섭[* 총독부의학전문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의학박사. 경성의학전문학교 및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초대 학장, 대한의사협회 초대 회장 역임.]과 함께 당대 3대 내과 의사로 손꼽혔으며, 해방 후에 윤일선과 함께 '건국의사회'에 참여한 바 있다. 경성제국대학 조 교수(조선총독부관보제604호) 서임. * [[윤태동]](尹泰東): 1900년 5월 13일 충북 충주 출신. 1925년 3월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수(1926~1929) 근무를 거쳐 1930년 경성제대 예과 강사로 임명되었고 1934년 7월에는 예과 교수로 승진하여 1934년 11월까지 재임하면서 예과(대입준비)생도들에게 독어를 가르쳤다. 1934년 12월 [[만주국]] 간도성 이사관(친임관 5등)으로 발탁되어 만주로 건너간 후 간도성(間島省) 성장까지 역임했다.경성제국대학 예과(대학입학준비교육기관)교수(조선총독부관보제2267호) 서임. * [[김종원(1900)|김종원]](金鍾遠): [[도쿄대학|도쿄제국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하였다. 당시 이공학부에 지질학과를 설치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1944년 김종원이 강사로 임명되었고, 1945년 7월 13일(조선총독부관보제5544호) 교수로 임명되었으나 곧 해방을 맞게 된다. 해방 당시 유일한 조선인 교수. 해방 후 경성대학의 교수로 있다가 경성대학이 1946년 8월 22일 국립서울대학교에 흡수돼 국립서울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다가 1947년 1월 23일 급환으로 별세하였다.[* 경기도 연천의 탄광을 답사하시다가 득병하여 귀경한지 3일만 이었는데 식중독 때문이었다고 한다. 근거;손치무교수연설문(지질학회지제12권제3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