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술국치 (문단 편집) === 구 대한제국 황실 === [[대한제국]] 황실은 황실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칭호도 다시 대한제국 이전 조선 시대처럼 [[폐하]] → [[전하(호칭)|전하]], [[태자]] → [[세자]] 식으로 [[제후]]의 격으로 격하되었다.] 황제도 [[이왕]](李王)이라는 봉호로 강등되었다. 일제에 적극 협력한 기존 지배층들은 조선 귀족령의 선포로 일본의 지배층에 포섭되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체제 선전과 조선인들의 복종을 이끌어내기 위해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을 이용했다. 특히 재위 시절 나라를 강탈당한 순종은 한국의 역대 군주 중에서 가장 많은 순행, 행행을 행해야 했다.[* 1917년의 [[함흥시|함흥]] 순행만 해도 병환으로 몸져 누워 있던 순종을 억지로 끌어내리다시피 행해졌다.] 물론 일제는 암묵적으로 고종과 순종을 이전처럼 일국의 군주로서는 대접해 주었다. 일제는 [[경성부]]에 주재하는 [[외교관]]들에게 고종과 순종을 알현하는 규칙을 만들었다. 1911년 정초와 고종의 탄신일에는 학생들이 [[덕수궁 대한문]] 앞에 모여 '황제 폐하 만세'를 외쳤는데 원칙적으로 안 되는 일이었지만 [[조선총독부]]는 이를 눈감아주었다. 또 구황실에 막대한 세비도 지급되어 1911년만 해도 150만 엔의 생활비가 지급되었고 고종과 순종에게 [[당구]], [[담배]], [[영화]] 등의 취미생활을 제공하는가 하면 [[영친왕]]의 일본 생활에 대한 영상을 찍어 보여주기도 했다. 영친왕도 일본에서 일본 귀족 예우를 받으며 살았다. 1919년에는 구황실 지급 세비를 180만 엔으로 증액시켰다. 1917년 [[함흥부]] 순행은 눈여겨볼 만한데 이때 [[대한제국]]을 상징하는 황제의 깃발들이 휘날리기도 해서 일부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순행하는 순종도 황제 복식을 갖추었다. 게다가 [[함흥부|함흥]] 주민들도 순종의 함흥 방문이 조선 왕조 임금으로서는 태조 [[이성계]] 사후 처음이었기 때문에 거의 환영 일색이었다. 그러나 순종이 일본 군함을 타고 [[도쿄]]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당시 조선인들에게 여러모로 충격을 주었다. [[고종(대한제국)|고종]]과 [[순종(대한제국)|순종]]부터 [[이왕]]의 [[작위]]와 봉록, 특혜를 거부하지 않자 많은 구황족들도 대일 항전에 동참하지 않고 일제가 제공한 지위와 특혜에 안주하거나 몇몇은 적극적으로 일제에 부역하기도 했다. 그와 별개로 500년간 조선 왕조의 백성으로 살아 온 이상 '''고종 생전에는 엄연히 복벽이 우세했다'''. 문제는 순종. 제대로 왕 노릇 해 본 적도 없고 독차사건 후유증으로 건강이 심하게 쇠약해져 독립해도 정상적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한 그가 고종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사람은 없었고 고종의 사망을 계기로 벌어진 [[3.1 운동]]부터 공화정을 지향하게 되었다. [[민족대표 33인]]에 유림 인사가 없는 것을 두고 황실에 실망해서 복벽을 주장하는 유림인사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유림도 당연히 끌어들이려 했다. 간재 전우를 중심으로 한 강경파는 외국 끌어다 외국 물리치는 게 대체 무슨 의미냐며 불참했고 기꺼이 참여하려고 했던 [[김창숙]], 김정호는 모친의 와병으로 기한을 맞추지 못해 민족대표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을 뿐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강령에 구 황실을 우대한다는 조건이 있긴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비주권군주제|'''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우대]]하는 것이다. 한편 근왕의식이 강했던 유생들 사이에서도 고종의 사망 이후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대해 20세기판 [[예송논쟁]]이 벌어졌다. 상복 반대파의 대표는 조긍섭으로 고종 무복설(無服說)을 주장하였는데 [[명나라]]가 망하자 자결한 [[숭정제]]를 들며 "망국의 책임이 있는 군주라면 마땅히 자결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일제로부터 '이태왕'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으니 고종을 위해 상복을 입는 건 일본의 신하임을 인정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으로 조긍섭은 최병심 등의 상복 찬성파들에게 맹렬한 공격을 받았고 제자에게도 절연당하는 등 많은 고초를 겪다가 결국 '고종은 일제로부터 독살당했으니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한 발 물러서서 상복을 입었다. [[대한민국 정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대한민국 정부 정통성이 훼손될 것을 염려해 구 황족 입국을 철저하게 막았다. 황족이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거나 보탠 것도 없었는데 증거 없는 소문은 나돌고 있어서 일제 치하에서 독립하자마자 다시 나타나 제국의 부활을 선언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었다. 애시당초 이승만 본인이 [[민주주의]] 국가를 위한 첫걸음으로서 '제국'을 배제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도 있었다. 이승만이 권력욕이 상당했고 실제로 [[독재]]를 저질렀으며 스스로를 '과인'이라고 부르는 등 구 조선-대한제국의 낡은 인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진 못했지만 그조차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정''''이어야 한다는 의식은 확고했다. 결국 구 황족은 한반도에 상륙하지 못했으며 이로서 구심점이 만들어질 여지조차 남기지 않아 [[대한제국 황실 복원론|황실 복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조선-대한제국을 떠난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확고해진 것이다. 이후 [[영친왕]]을 비롯한 해외 구황족의 귀국은 [[박정희]]가 [[5.16 군사정변]]으로 [[국가재건최고회의|정권을 잡고 나서야]] 가능해졌는데 이것조차도 감사할 일로서 구황족이 그 이상, 즉 황족에게 돈을 내 달라거나 [[경복궁]]을 황족에게 제공하는 요구를 할 처지는 못 되었다. 귀국조차도 세월이 흘러 구황실에 대한 한국 대중들의 악감정이 사그라들었기 때문에 겨우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실 복원을 위해 실제로 행동에 옮길 경우 [[국가보안법]] 위반이 될 가능성이 크다. 당시의 [[대한제국]] 황실이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기는 했다. 고종의 [[비자금]]도 [[러시아]]와 일제에 의해 행방이 묘연해졌기 때문에 [[독립군]]을 금전적으로 지원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일제가 주는 구황실 지원금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애초에 당시 한국의 선진 지식인들 대부분이 [[공화정]]을 선호하는 추세였기 때문에 황실과는 대립 관계라 이들과 연대하는 것 역시 말이 안 되었다. 대표적으로 1917년 발표한 [[대동단결선언]]만 봐도 "융희 황제가 삼보를 포기한 [[8월 29일]]은 우리 동지가 삼보를 계승한 날로서,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곧 민권이 발생한 날입니다."라고 했다. 물론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십수년간 삽질을 한 고종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은 아니고 단지 이 시점에서는 이미 취할 수 있는 남은 수가 없었다는 뜻이다. [[분류:1910년/사건사고]][[분류:메이지 시대/사건 사고]][[분류:조일관계]][[분류:한일관계]][[분류:대한제국의 사건사고]][[분류:외교 사건 사고]][[분류:무단 통치기/사건사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