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술국치 (문단 편집) == 관련 어록 == >"[[메이지 덴노|짐]]은 [[대한제국]]의 [[순종(대한제국)|황제 폐하]]와 더불어 이 사태를 보고 대한제국을 들어서 우리 [[일본 제국]]에 병합하여 이로써 시세의 요구에 응함이 부득이한 것이 있음을 생각하여 이에 영구히 [[일제강점기|한국을 제국에 병합]]케 한다. 한국 황제 폐하 및 그 황실 각원(各員)은 병합 후라도 [[왕공족|상당한 예우]]를 받을 것이며,[* 한국과 일본을 각기 동등한 자격으로 1:1로 통합하겠다던 기존 일본의 명분을 걷어차 버린 대목이다. 실제로 이에 낚인 [[이용구|사회인]]들도 당시엔 상당했다. 그렇지만 일본은 최소한 [[이왕가]](李王家)를 대접해 주겠다는 약속 자체는 어기지 않았고 따라서 한국 황실은 확실히 상당한 대우를 받았는데 일본 귀족인 [[화족]]보다는 1단계 위로, [[일본 황실]]보다는 반단계 ~ 1단계 아래로 쳐 줬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대접을 받은 것에 만족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은 대가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부터 해방 후의 [[대한민국]] 정부도 [[복벽]]을 거부하고 [[공화정]]을 줄곧 고수하면서 동족에게 버림받게 되었다. 임정은 강령으로 '구황실을 예우한다'는 조항을 넣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예우한다는 것이었지 지금 [[일본 황실]]처럼 황조를 유지한다는 뜻이 아니었다.] 민중은 직접 짐의 위무 아래에서 그 강복(康福)을 증진할 것이며, 산업 및 무역은 평온한 통치 아래에서 현저한 발달을 보이기에 이를 것이니, 동양의 평화가 이에 의하여 더욱 그 기초를 공고하게 함이 짐이 믿어 의심치 아니하는 바이다." >------ > '''일본 [[메이지 덴노]]의 조서''', 1910년 '''8월 29일'''.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순종(대한제국)|짐(朕)]]이 부덕(否德)으로 [[조선/왕사|간대(艱大)한 업을 이어받아]] 임어(臨御)한 이후 오늘에 이르도록 정령을 유신(維新)하는 것에 관하여 누차 도모하고 갖추어 시험하여 힘씀이 이르지 않은 것이 아니로되, 원래 허약한 것이 쌓여서 고질이 되고 피폐가 극도에 이르러 시일 간에 만회할 시책을 행할 가망이 없으니 한밤중에 우려함에 선후책(善後策)이 망연하다. 이를 맡아서 지리(支離)함이 더욱 심해지면 끝내는 저절로 수습할 수 없는 데 이를 것이니 차라리 [[일본 제국|대임(大任)을 남에게 맡겨서]] 완전하게 할 방법과 혁신할 공효(功效)를 얻게 함만 못하다. 그러므로 짐이 이에 결연히 내성(內省)하고 확연히 스스로 결단을 내려 이에 한국의 통치권을 종전부터 친근하게 믿고 의지하던 [[일본 제국|이웃 나라 대일본]] [[메이지 덴노|황제 폐하]]에게 양여하여 밖으로 동양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역(八域)의 민생을 보전하게 하니 그대들 대소 신민들은 국세(國勢)와 시의(時宜)를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소란을 일으키지 말고 각각 그 직업에 안주하여 일본 제국의 문명한 새 정치에 복종하여 행복을 함께 받으리라. > >짐의 오늘의 이 조치는 그대들 민중을 잊음이 아니라 참으로 그대들 민중을 구원하려고 하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들 신민들은 짐의 이 뜻을 능히 헤아리라." >------ > [[순종실록]] 4권, 순종 3년 '''8월 29일''' 양력 2번째기사, 순종실록 본편의 마지막 기사[* 이후 순종이 붕어하기까지의 기록은 순종실록 부록으로 이어진다.] > 융희 4년 8월 29일 월요 맑음 / 음력 경술년 7월 25일 병인일 > 경 조동희(趙同熙) 진(進) > 기주관 김천수(金天洙) 진 이용구(李龍九) 진 > 전제관 김유성(金裕成)도서과(圖書課) 진 윤희구(尹喜求) 진 > 주사 조병억(趙秉億) 진 조성흡(趙性翕) 진 정낙붕(鄭樂鵬) 진 장석준(張錫駿) 진 >---- > 임금이 [[창덕궁]]에 있었다. >---- > 칙유(勅諭). 황제는 이르노라. 짐(朕)이 부덕(否德)으로 간대(艱大)한 왕업(王業)을 이어 받들어 임어(臨御)한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유신 정령(維新政令)에 관하여 속히 도모하고 여러모로 시험하여 힘써온 것이 일찍이 지극하지 않음이 없었으되 줄곧 쌓여진 나약함이 고질을 이루고 피폐(疲弊)가 극도(極度)에 이르러 단시일 사이에 만회(挽回)할 조처를 바랄 수 없으니, 밤중에 우려(憂慮)가 되어 뒷갈망을 잘할 계책이 망연(茫然)한지라. 이대로 버려두어 더욱 지리하게 되면 결국에는 수습을 하지 못하는 데에 이르게 될 것이니, 차라리 대임(大任)을 남에게 위탁하여 완전할 방법과 혁신(革新)의 공효(功效)를 이루게 하는 것만 못하겠다. 짐이 이에 구연(瞿然)히 안으로 반성하고, 확연(確然)히 스스로 판단하여 이에 한국의 통치권(統治權)을 종전부터 친근하고 신임(信任)하던 이웃나라 대일본 황제 폐하께 양여(讓與)하여 밖으로 동양(東洋)의 평화를 공고히 하고, 안으로 팔도 민생(民生)을 보전케 하노니, 오직 그대 대소 신민(大小臣民)들은 나라의 형편과 시기의 적절함을 깊이 살펴서 번거롭게 동요하지 말고, 각각 그 생업에 편안히 하며 [[일본 제국]](日本帝國)의 문명 신정(文明新政)에 복종하여 모두 행복을 받도록 하라. 짐의 오늘 이 거조는 그대들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그대들을 구활(救活)하자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 그대 신민(臣民) 등은 짐의 이 뜻을 잘 체득하라. >---- > 내각 서기관장(內閣書記官長) 훈1등 한창수(韓昌洙)에게 특별히 태극장을 하사하였고, 장례원 악사장(掌禮院樂師長) 훈6등 백우용(白禹鏞)은 특별히 훈5등에 승서(陞敍)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으며, 재무관(財務官) 훈5등 조재영(趙在榮)은 특별히 훈4등에 승서하여 팔괘장을 하사하였다. >------ >'''[[승정원일기]] 마지막 날 기사'''[[http://db.itkc.or.kr/dir/item?itemId=ST#/dir/node?dataId=ITKC_ST_ZA_A04_07A_25A_00030|#]], 이 기사를 작성한 후 [[승정원]]은 바로 [[한국통감부]]에 의해 전격 폐지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달 뒤에 세워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