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술국치 (문단 편집) == 여담 == * [[일본]]에서도 [[안중근]]의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의거]]가 워낙 유명한 만큼 [[이토 히로부미]]가 합병 반대파였으며 안중근의 의거 때문에 [[대한제국]]이 합병을 자초하였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는 급격한 합병에 부정적이었을 뿐 합병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으며 일본 내각은 이토 히로부미가 죽기 3개월 전인 [[1909년]] [[7월]]에 이미 대한제국의 합병을 의결한 상태였다. 자세한 내용은 [[이토 히로부미]] 문서로. 즉, 온건파는 '''온건하게 한국을 합병하자'''는 쪽이었지 '''합병하지 말자'''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 중요하며 어차피 합병은 됐을 거라는 뜻이다. * [[이위종]]의 아버지인 이범진은 주러시아공사로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된 후에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남아 대한제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다는 깊은 절망에 빠져 자결하였다. 금산 군수로 <임꺽정>의 저자 벽초 [[홍명희]]의 아버지이기도 한 [[홍범식]]도 목을 매 자결하였으며[* 아이러니하게도 [[홍명희]]의 할아버지이자 홍범식의 아버지 홍승목은 [[친일파]]로서 [[조선총독부]]에서 주는 작위를 받았다.] 그 외에도 <매천야록>의 저자 매천 [[황현]] 등 많은 선비들이 자결하였다. 그러나 [[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 때와는 달리 현직 고위 관료 중 [[민영환|자결한]] [[박승환|이]]는 없었다. * 한편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냈다고 한다.[[http://web.archive.org/web/20130204083910/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0708/h2007082818000124390.htm|#]] 이는 이미 [[을사조약]], 군대 해산, 고종 퇴위 등으로 인해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대조적으로 을사조약 체결 시에는 온 나라가 뒤집혔고 백성들이 "나라가 망했다"고 공포에 떨며 울부짖었다는 유생들의 기록이 있다. * 이미 일본은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을 박탈한 후 1907년 [[정미 7조약]]을 통해 입법권과 인사권, 행정권을 장악하고 1909년 [[기유각서]]로 사법권까지 장악해 중앙통치권력을 무력화했으며 이후 같은 해 보안법을 통해 각종 집회와 모임을 제재하여 조선인들의 회합을 차단하고 신문지법을 통해 통감부의 방향에 반하는 언론을 원천 차단했다. * 이미 [[대한제국]]의 중앙군은 1907년 강제로 [[대한제국 군대 해산|해산되었으며]] 그나마 지방 각지에서 저항하던 [[의병]]은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채응언]]이 이끌던 [[황해도]] 의병을 제외하고는 와해되었다. 저항 여력이 있는 세력은 이미 국외로 탈출하여[* 서간도의 삼원보, 13도 의군이 있었던 [[블라디보스토크]], [[북간도]]의 용정 등.]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8월에는 사실상 주권을 박탈하는 서류상의 절차만 남겨둔 셈이었다. 한일병합조약 당일에는 이미 일련의 피탈 과정으로 인해 만연한 무력감과 국내 저항세력 부재로 인해 1905년 을사조약 당시보다 저항이 적었으며 이에 일부 해외 학계에서는 [[일제강점기]]를 아예 1905년을 시작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 이 조약으로 인하여 한국은 약 35년간 일본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결국 일제의 패망날이던 [[1945년]] [[8월 15일]] [[8.15 광복|광복]]되었다. * 아이러니하게도 이 당일에는 백범 [[김구]]의 생일이기도 하였는데, 1925년 [[나석주]] 의사가 자신의 옷을 저당으로 잡아 김구의 생일상을 차려주자 안 그래도 안 좋은 날이고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회갑]]연도 못 챙겨줬다는 죄책감 때문에 이후에는 생일잔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 2009년 9월에는 당시 대통령이던 [[이명박]]이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 '''기념'''으로 일왕을 국내에 초대하고 싶다"는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기념이라는 단어를 쓴 것에 대해 논란이 일었는데 사실 기념 자체는 무언가를 축하하거나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아닌 '''뜻깊은 일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는 중립적인 단어이다. 쉽게 말하자면 '기억'의 강화 버전 혹은 영어 'commemorate/observe'에 대응되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전쟁기념관]]이나 [[6.25 전쟁]] OO주년 기념식 같은 명칭만 봐도 알 수 있고 [[가톨릭교회]]의 [[미사]]에서도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을 기념한다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사전 설명이 그렇다는 것이지 현대 [[한국인]]들은 '기념'을 영어의 'celebrate'에 준하는[* 여담으로 [[영어권]]에서도 해당 단어는 원칙상 '기념'의 뜻으로 쓰일 수 있으나 축제 분위기에 더 자주 쓰인다는 어감으로 인해 무거운 상황에서는 기피된다.] 긍정적인 상황을 표현하기 위해 쓰는 경우가 압도적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이 문제가 될 만한 단어 선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 경술국치 100주년이 됐던 2010년 [[3.1절]]에 [[2010년 삼일절 사이버 전쟁|경인대첩]]이 일어나기도 했다. * 많은 사람들이 아래 사진을 경술국치가 일어난 당일날 [[경복궁 근정전]]에 걸린 [[일장기]]를 찍은 사진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이 사진은 경술국치 당일 찍힌 사진은 아니며 [[1915년]] [[10월 1일]] [[조선물산공진회]] 행사용으로 섭외한 [[비행기]]를 담은 사진이다. [[동아일보]]가 <사진으로 보는 한국 백년>이란 책을 내면서 이 사진을 경술국치 때의 사진이라고 소개하고 그 뒤로 비행기가 찍힌 부분을 잘라낸 사진이 여기저기 실리면서 오해가 생겼다.[* 다만 링크에 적힌 원문은 ''''합방이 되자 일인들은 재빨리 경복궁 근정전에 그들의 국기를 내걸고 주인 노릇을 하기 시작했다. 근정전 위를 날고 있는 것은 일군(日軍) 비행기 삼중호 (三重號)다.''''라고 되어 있어 경술국치 이후 줄곧 근정전에 일장기가 걸려 있었다는 뜻이지 이것이 1910년에 찍힌 사진이라고 단정짓지는 않았다.][[https://news.kbs.co.kr/news/view.do?ncd=4273018|경술국치 109년…‘경복궁 일장기’ 진실은?, KBS]] [[파일:/news/201001/04/khan/20100104105319968.jpg]] * 한일병합 소식은 이웃국가인 [[청나라]]에도 상당한 충격을 안겨다 주었는데, 당시 청나라 주일공사인 왕대섭(汪大燮)은 [[일본]]의 한국 병합이 중국 [[만주]] 지역의 정세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면서 그에 대한 대비책 마련을 촉구하는 상주문을 제출하였다. 청나라 외무부에서도 만주 지역의 안전 문제, 특히 만주 거주 한국인 문제를 걱정하면서 길림순무(吉林巡撫) 진소상(陳昭常)에게 타전하여 [[장춘]](長春)·[[혼춘]](渾春)·[[연길]](延吉) 각 지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의 한국 병합 반대 움직임에 각별히 경계 태세를 갖추도록 지시하였고 심지어 연길 거주 한국인들의 병합 반대 행동을 엄중 단속해 줄 것에 관한 주청일본공사 이쥬인 히코 키치(伊集院彦吉)의 요청마저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출처: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에 관한 청 정부의 인식과 대응, 취안허슈(權赫秀) 중국 요녕대학 역사문화학원 교수] 무엇보다 당시 [[청나라]] 황실은 '[[만주국|우리 역시 한국 황실처럼 되지 말란 법이 없다]]'는 진지한 걱정을 하였는데 이미 당시 청나라 황실도 다 쓰러져 가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선통제]]의 황태후이자 그의 [[수렴청정]]을 하고 있던 [[효정경황후]]는 “[[삼한]]은 정말로 망하였다. 우리나라가 스스로 돌볼 겨를도 없으니 결코 상관할 수는 없지만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변경 지역을 날로 노리고 있으니 반드시 조정의 신하들과 더불어 대비책을 잘 마련하여 추호의 손실도 없도록 해야 한다.”[* 출처: 대공보(『大公報』), 宣統二年八月十八日(1910. 9. 21)]고 말하며 앞날을 우려했다. 경술국치 직전 일본을 방문하고 있었던 재순(載洵. [[순친왕|감국섭정왕 재풍]]의 동생)은 청 정부의 최고 권력기관인 군기처(軍機處)로 타전하여 한일합병 관련 소식을 보고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지금 알아본 데 의하면 일본인(日人)이 장차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대거동(大擧動)이 있을 것인즉 위급존망(危急存亡)이 간발(間髮)에 걸려 있다. 아국(我國)이 만약 서정(庶政)을 더 이상 개혁하지 않고 시급히 대비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전철(覆轍)을 밟게 될 것으로 걱정되니 눈앞으로 다가온 화 때문에 두렵고 절박하기가 그지없다. 재순(載洵)은 (한국병합에 대한)견문(見聞)이 누구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죽음을 무릅쓰고 비밀리에 진언(陳言)하니 대신 상주(上奏)해 주기 바란다.” >----- >출처-『淸宣統朝外交史料』 卷16, 18쪽. 이러한 황실의 우려는 바로 다음해인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 참고로 경술국치의 연도를 아는 한국인의 비율이 낮은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갤럽 조사에 따르면 한국인의 약 14%가 알고 있었으며 특히 70대 이상 아는 사람의 비율이 5%로 극히 낮았다.[[https://www.gallup.co.kr/gallupdb/reportContent.asp?seqNo=1316|갤럽 조사]] * 일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조례로 경술국치일에 조기를 달도록 규정했다. * [[마이클 잭슨]]이 전성기였던 [[1980년대]]에는 8월 29일을 경술국치가 아닌 마이클 잭슨 생일로 인식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한다. * 1995년 8월 일본 [[무라야마 도미이치]] 총리가 한일합병은 합법적이었다는 발언으로 논란을 빚었다. 이는 일본 정부의 종래 입장을 그대로 되풀이한 것이고 그동안 사회당 위원장으로서 침략전쟁 인정과 과거 사죄에 앞장서 온 무라야마 총리의 발언이라는 점에서 더욱 충격을 줬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3955790|日총리,"한일합방 법적으로 유효"발언 파문]] 연합뉴스 1995.10.11][*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61289_30705.html|무라야마 총리,'한일합방 조약 합법적으로 체결됐다'망언]] mbc 1995.10.11] 이런 발언에 대해 당시 [[외교통상부]]는 소극적으로 대응해 국민들의 거센 질타를 받았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61411_30705.html|정부,무라야마 총리의 망언에 대해 늑장 대응]] mbc 1995.10.11] 당시 무라야마의 이 발언으로 인해 뉴욕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양국간 정상회담마저 무산되었고 [[한일관계]]는 최악으로 경색되었다.[*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61729_30705.html|김영삼 대통령과 무라야마 총리의 뉴욕 정상회담 취소]] mbc 1995.10.17][* [[https://imnews.imbc.com/replay/1995/nwdesk/article/1999534_30705.html|일본 무라야마 총리의 망언으로 한일관계 냉각]] 1995.10.18 mbc][*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55683|일본 총리 망언에 대한 강경대응 촉구]]] 무라야마 총리는 일본 정부가 과거의 역사에 대해 깊은 반성과 사죄의 뜻을 밝혔지만 이는 정치적, 도의적인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총리]]가 공식석상에서 [[한일합방]]을 합법이라고 말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이후 줄곧 한일합방조약은 합법이라고 주장해 왔으며 일본의 수많은 정치인들도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1995년 6월에는 와타나베 전 외무장관이 지방에서의 강연을 통해 한일합방이 강제로 체결된 것이 아니며 합법이라고 주장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단편적으로 들으면 오해를 사겠지만 의사록을 잘 읽어보면 자신의 생각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라며 발언을 철회하지 않았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55654|일본 무라야마 총리 망언 kbs 1995]]] 무라야마 총리는 17일에도 한일합병조약은 형식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해 이 조약이 합법적으로 체결됐음을 거듭 강조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답변을 통해 이같이 말하고 합방조약의 형식과 정치적도의적 견해는 별개라고 밝혔다. 무라야마 총리는정치적 도의적 실태 론으로 판단하면 한일합방조약이 대등하고 평등하게 체결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 자신의 발언이 파문을 일으킨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무라야마 총리는 식민지 지배가 현실적으로 있었던 만큼 사실을 직시하고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무라야마 총리는 그러나 지난 5일 한일합방조약과 관련한 자신의 망언을 취소하지는 않았다.[* [[http://news.kbs.co.kr/news/view.do?ncd=3755875|무라야마 일본 총리 "합병 합법" 되풀이 kbs 1995]]] 그러나 11월 19일 [[김영삼]]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자신의 발언에 대한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이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500289101006&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5&officeId=00028&pageNo=1&printNo=2397&publishType=00010|발언'잘못 시인]] 1995.11.13 한겨레][*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900099101004&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9&officeId=00009&pageNo=1&printNo=9274&publishType=00010|"日(일)은 과거역사 바로봐야"金(김)대통령 "韓國民(한국민)고통에 깊이사과]] 1995.11.19 매일경제][*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11900209106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1-19&officeId=00020&pageNo=6&printNo=23030&publishType=00010|韓(한)-日(일) 정상회담「과거사妄言(망언) 갈등」일단 봉합]] 1995.11.19 경향신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