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신대기근 (문단 편집) ==== 조정 내 상황 ==== 이런 마당에 조정은 정쟁에만 관심을 쏟았다는 인식은 그저 조선에 대한 안 좋은 인식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경신대기근이 한창일 당시, 조정에는 정쟁 따위에 힘을 쏟을 여력조차 없었다. 실제로 1차 [[예송논쟁]]은 기근 발생 10년 전인 59년, 2차 예송은 현종 말년인 74년에 발생했으며, 대기근 시기에는 예송과 관련한 상소문도 사라진다. 집권한 [[서인]]들은 왕실에서 조금이라도 사치로 판단될 만한 행사들을 비판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자구책을 내놓거나, 이와 관련해 척신 세력과 함께 상대 당을 비판하는 경우도 있었다. 경신대기근 기간에는 재상급 인사들마저 10여 명이나 사망했다. 대표적으로 경신대기근이 일어난 첫해(1671)에 사망한 당시 병조판서 김좌명을 들 수 있는데, 이 사람은 [[대동법]] 확립에 큰 공을 세운 [[김육]]의 장남이며 그의 동생이 바로 숙종의 외할아버지 김우명이다. 즉, 현종에게는 처백부 되는 인물. 이런 정치 명문가의 인물이 죽었을 정도면, 그 피해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당시 지배층들의 비축한 식량의 양이 상당히 적었음을 의미하고, 근검절약이 단순히 국가정책이 아니라 당시 지배층의 일반적인 사고라고 볼 수 있다.] 김좌명의 후임으로 병조판서가 된 [[서필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몇 달 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우의정 홍중보, 전 형조판서 조계원,[* 현종때 대왕대비였던 [[장렬왕후]]의 백부이기도 하다.] 함릉부원군 [[이해]], 전 부제학 [[이민구]], 전 호조판서 [[오정일]], 예조판서 조복양, 예조참판 유철, 한성부좌윤 [[이정기]], 전 영의정이자 영중추부사인 [[이경석]], 개성유수 박장원도 이 때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경신대기근이 지나간 이후에도 그 후유증으로 유림의 거두이자 양송 중 하나였던 [[송준길]]도 목숨을 잃었고 이후에도 한성부우윤 권시, 원임관찰사 정언황, 홍문관제학 정두경, 좌의정 이경억, 전직 영의정이자 영중추부사인 [[정태화]], 우의정 [[이완(1602)|이완]]도 목숨을 잃었다. 일반 백성보다 그나마 부유했을 지배층까지도 죽어나가는 진정한 대위기였던 것이다.[* 그나마 고위층은 굶어죽는게 아니라 병걸려 죽는 것이지 조선왕조실록에는 벼슬이 낮아 봉록이 낮은 자는 태반이 굶주리고 있으며 구실아치들은 거의 다 굶어 일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라는 경악스런 애기까지 실려있다. 봉록이 낮대도 사대부는 사대부고 시대 특성상 벼슬을 할 정도면 공부를 한 사람이고 공부를 한 사람이라면 그만큼 집안에 쌓아놓은 부도 있기는 하다는 얘기인데 그런 사람들의 태반이 굶주릴 정도면 말할 것도 없다.] 지배층마저 이 지경인데 민생 수준은 어떠했겠는가? 지배층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대기근이 찾아온 것이 아니라, 지배층이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대책을 세우려 해도 워낙 압도적인 재앙이라 딱히 손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왜란|임진년의 병화]](兵禍)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참고로 [[을병대기근]]에도 이에 못지않게 대기근이 시작된 숙종 22년(1696) 7월에 예와 이제에 듣지 못한 재앙이라고 표현했다. 다만 이는 사관의 평이지 민간의 평이 아니기는 하나 그래도 대기근이 직격타를 맞는 일반 백성도 아닌 나름대로 벼슬도 하고 녹봉도 받는 관리가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직접적으로 죽어나가는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것이다.][* 이 당시 임진년을 기억하고 있는 정도의 노인들이라면 구순이 넘은 나이이기에 나라에서도 특별히 신경쓸 정도로 장수하고 있는 인원들의 증언이다.] >---- >현종실록, 현종 12년(1671) 2월 29일 5번째 기사 1671년도 저물어가는 12월, 윤경교가 이 때까지의 사망자가 100만 명을 상회한다고 보고했다. 물론 이는 추정치고, 실제 구휼소에서 기근으로 죽었다고 판정한 인원은 8만 5천이다. 평소 조선에서 기근으로 죽는 인원이 3천 명 내외라는 걸 생각하면 문제의 심각성을 짐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물론, 지방 수령들이 근무 성적 때문에 축소 보고했을 가능성도 충분하므로, 작게 잡으면 20만~30만, 크게 잡으면 구휼소 사망자의 5~10배인 40만~85만 명 정도로 본다. [[1669년]] 기준으로 조선 [[인구]]는 공식적으로는 516만 명이나 실제 인구는 최대 1500만~1600만 내외로 추산되었다.[* 양반의 외거 [[노비]], 머슴으로 들어간 인구나 유랑민이 상당했기에 호적에 등록된 인구가 실제 인구와 큰 차이를 보였다.] 즉, 대기근 2년 동안 인구의 절대다수가 [[기아(동음이의어)|기아]]를 직접적으로 체험했고 그 중에 최소한 1.5%, 많으면 5% 가까이 죽어나간 것이다. 가히 현세에 도래한 지옥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당시 노인들이 말했다는 "[[임진왜란|임진년 병란]]도 이것보다 참혹하지는 않았다." 하는 평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기근 직전인 1669년 조사된 [[인구]]수는 5,164,524명인 반면 기근 직후인 1672년 조사된 인구수는 4,695,611명으로, 공식적으로는 3년 만에 323,033명 가량이 사망한 셈이다. 상술하였듯 실제 인구는 호적에 등록된 인구보다 많았으므로 실제 사망자 수 또한 32만 명보다 월등히 많았을 것이다.] [[1671년]] 여름 아사자가 최고도에 달했을 때, 형조판서 서필원이 청나라의 [[쌀]]을 [[수입]]하자고 현종에게 건의했다. 당시 조정은 운송과 후환을 두려워해서 반대했다. 그해 말 기아를 구제하기 위한 정부의 비축미가 바닥나자, 이번에는 현종이 청나라 쌀 수입건을 다시 꺼냈다. 하지만 신하들은 국가의 위신이 훼손된다고 반대를 했다. 명분에 집착하는 신하들에게 현종은 이곳의 사세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으나 신하들은 그조차도 부정적이었다. 사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침략당하고 수탈당하며, 비록 이전보다는 많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서로 간에 악감정이 엄청나던 상황에서, 과연 청나라를 믿고 곡식을 들일 수 있을지 의문이었을 것이다. [[강희제]]도 조선 사신에게 조선의 사정을 듣고는 [[군약신강]](君弱臣強)이 문제니 왕권을 강화하라고 대놓고 비난할 정도로[* 즉, 강희제는 이 원인을 '왕이란 자가 신하들을 통제하질 못하니 정책을 추진하려 해도 사사로이 막혀 조정이 돌아가질 않아서 이 사단이 난 것 아닌가'라고 본 것이다.] 청나라도 조선에 대한 시각이 별로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시기에는 이 말을 할 당사자인 강희제는 20대도 안 된 새파란 애송이 황제였고 경신대기근 이전에는 [[구왈기야 오보이]]의 반란을, 경신대기근 이후에는 [[삼번의 난]]에 시달릴 정도로 후대의 명성과는 달리 정치적 불안정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청나라도 이상한파가 심했고 [[요동]]이 기근에 시달렸으니, 청나라가 과연 쌀을 수출할지도 의문이었다. 이 부분을 가지고 경신대기근에서도 정말 지배층마저 굶어 죽을 상황이었으면 명분이든 그보다 더한 것이든 수용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니까 조선의 지배층은 충분히 먹고 살만했다는 근거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는데 당시 실록 기사를 보면 한성 내에서도 사대부들이 기아로 고생한다는 내용이 있다. [[http://sillok.history.go.kr/id/krb_11206014_002|##]] 또한 실록을 보면 현종 12년(1671) 8월 조선 조정은 기근으로 재정난과 식량난이 극심해지자 청에 보내는 세폐를 감면하는 것이 어떤가 의논을 하지만 청나라가 세폐를 제대로 바치지 않을 경우 뒤에 이를 가지고 더 무거운 트집을 잡을까 우려하여 논의를 그만두는 기사가 있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rb_11208008_002|##]] 청나라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감안하면,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사정이 나아서 포기했다기보다는 그 동안 조선이 수집한 정보를 보면 청나라가 조선이 원하는 만큼 구휼식량을 보내줄지가 의문스러운 데다, 받아온 후 더한 정치적 군사적 종속을 우려했기 때문에 안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병자호란]] 직후의 상황으로 보건대, [[청나라]]가 구휼을 핑계로 내정간섭을 시도했을 공산이 크고, 최악의 경우 [[고려]] 시대 [[원 간섭기]]가 재림했을 수도 있었다. [[한족]] 왕조의 사례이지만 [[명나라]] 또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것이 명분이 되어 명나라 사신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하는 일로 이어지기까지 한 바 있다.] 사실 기아가 판치는 와중인 만큼 정말로 외적이 침공하면 답이 없기에 청나라에게 기아로 고생 중이라는 점을 들켜 침공당하는 것을 우려했다면 그렇게 이해 못할 명분은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