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애왕 (문단 편집) ===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무엇을 했는가? === 현대에는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인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반론이 제시되고 있다. || 1. 경애왕의 이런 저런 시도들을 볼 때, 분명 무능하진 않은 용기있고 나름 유능한 군주였으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분명히 후백제군이 수도 경주 코앞 영천까지 왔다는 걸 인지하고,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런 마당에 설마 술을 마시고 놀고 있었을까? 일단 후백제군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인지를 했고, 고려에게 도와달라는 요청쯤은 할 정도의 개념은 있었다. 아무리 개념없이 굴어도 저 정도 개념이 있는데 자기 목숨을 걸고 그런 풍전등화의 상황에 술을 마시고 논다는 게 맞지가 않다. 2. 포석정은 흔히 그 특이한 물의 흐름을 이용해 술잔을 띄우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 놀이를 하는 곳으로 알려진 곳이지만, 경애왕이 붙잡혀 최후를 맞았을 때는 음력 11월, 양력으로 치면 12월이다. 즉 '''칼바람이 불고 얼음이 얼기도 하는 한겨울'''이었으므로 그런 시기에 야외에서 술잔을 띄우면서 한가하게 놀기는 어렵다. 경주는 겨울에도 눈이 잘 안 내리고, 얼음도 쉽게 얼지 않는 따뜻한 남부 지방이라 술잔을 띄우는 것 자체는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굳이 한겨울 야외에서 달달 떨면서 그거나 구경하고 논다는 것도 좀 부자연스럽다. 3.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조-에는 "遊鮑石亭宴娛"라고 되어 있다. 흔히 "포석정에서 연회를 벌이고 놀았다"라고 해석되는 부분인데 '[[遊]]'는 "놀다" 말고도 "방문하다"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으며, 실제로 《삼국사기》에서는 왕이 절에 다녀올 때도 이 글자를 썼다. 4. 놀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다른 곳도 많았다. [[안압지]]와 임해전 등의 인공호수들. 이 곳들은 신라 말기에도 연회장으로 사용하고 있었고[* 예를 들어 [[경순왕]] 때 왕건이 서라벌로 찾아오자 안압지에서 연회를 열어 왕건을 접대했다.] 실제로도 왕과 귀족들의 유희 용품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이런 놀 곳이 많은데 굳이 포석정에서 놀 이유가 없다. 5. 포석정은 신라의 성산(聖山)인 경주 [[남산(경주)|남산]]의 중심에 있다. 포석정 북쪽 가까운 곳에는 시조 [[박혁거세]]가 나왔다는 [[나정]]과 [[신궁]]이 있으며, [[알영부인]]이 나온 알영정, 박혁거세의 무덤 [[오릉]], 그리고 후기 신라 박씨 왕통의 상징적 장소랄 수 있는 [[배동 삼릉]][* 초기 신라 박씨 왕조의 마지막 왕인 [[아달라 이사금]](제8대)과, 후기 박씨 왕조의 두 왕[* [[신덕왕]](제53대), [[경명왕]](제54대)]도 여기에 묻혔다고 알려져 있다. 수백년간 김씨 왕통이 이어져오다 왕위에 오른 박씨 경애왕에게는 자신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장소 중 하나랄 수 있다.] 등 여러 [[성지]]가 많다. 또한 기록에도 '포석정'이란 이름 대신 '''포석사'''(鮑石祠)란 이름도 자주 나오고, 실제로 이 터에서 '포석'(砲石)이란 글자가 새겨진 기왓장도 발견되어 포석정이 노는 장소가 아니라는 주장이 점차 설득력을 얻고 있다. || 그래서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설이 제기되었다. 포석정은 사실은 연회의 장소가 아닌 '''일종의 성지'''로서, 술잔을 띄우는 그 구조물도 사실은 연회용이 아닌 '''제례용'''이었다는 것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는 포석정이 '포석사'(鮑石祠)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포석정이 사실 제례용 사당이었다는 설을 뒷받침한다. 다만 필사본 《화랑세기》는 사학계에서 위서론이 대세라 일부 학자 외에는 사료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포석정 제사시설 설을 주장한다고 그게 꼭 필사본 《화랑세기》 긍정론으로 연결되진 않는다.] 마침 음력 11월은 신라, 고려를 막론하고 '''[[팔관회]]'''가 있었던 시기였다. 즉, 나라가 위급해지자 경애왕은 팔관회를 통해 신라의 선조들에게 나라의 평안과 안녕을 빌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경애왕은 "나라 망하는데도 술쳐먹고 논" [[막장]] 왕이 아닌, 흡사 서로마 제국 말기처럼 자력만으론 운명을 타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이것저것 다해볼려고 하다가 그래도 불안하니 천지신명에게 기원할 수밖에 없었던 눈물나는 망국의 군주라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가설이며''' 정설은 아니다. 별로 의미 없는 정황 증거를 제외하면 중요한 근거는 양력으로 12월경인 음력 11월에 포석정에서 덜덜 떨면서 잔을 띄우고 놀 이유가 없다는 것과, 견훤군이 기습 공격해 오는 것을 알면서도 놀고 있었겠느냐는 것인데, 전자는 꼭 겨울에 유상곡수연(잔 띄우기) 놀이를 못한다는 법은 없고, 후자는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놀았다는 것보다 더 잘 설명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견훤군이 공격해 오는 것을 알면서 비빈들을 거느리고 방어 거점 밖으로 나가는 것도 유희를 위해서건 제사를 위해서건 지나치게 안이한 행동인 것은 마찬가지이다. 정 안 되겠으면 고려 제8대 현종이나 조선 제14대 선조처럼 도망을 간다든지,[* 말은 쉽지만 사실 이 시점쯤 되면 신라 조정 입장에서는 딱히 파천 할 곳도 없었다. 그나마 친신라세력으로 추정되는 김해의 [[소율희]]조차 고려의 강주 점령과 백제의 대야성 점령 이후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북쪽의 명주지역은 아예 궁예 시절부터 신라에서 완전히 이탈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조정의 파천은 그냥 타국=고려로의 망명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보다 철기병이 몰려오는데 도망간다고 해봐야 길 위에서 밟혀 죽을 판이다.] 아니면 경주 근처의 [[명활산성]] 같은 데라도 올라가 농성하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다만 포석정의 위치가 [[남산(경주)|남산]] 등산로의 시작점이며, 남산 위에도 지금까지 성벽 일부와 군량고 유구가 남아 있는 남산신성이 있기는 하다. 남산신성에는 3개의 창고가 있었는데 그 중 좌창지는 가로 47미터, 세로 18미터나 되는 큰 창고였다. 정황상 증거지만, 경애왕이 포석정 위치에서 잡혔다면 [[병자호란]]처럼 산성에서 농성하려다 실패한 것으로 추측할 수는 있다. 명활산성을 두고 굳이 남산을 택한 이유라면 명활성이 사방에서 포위되기 좋은 방면 남산은 남쪽으로 산줄기가 계속 이어져있어 포위를 면하고 유사시에는 소율희나 강주 고려군의 구원도 기대할 수 있다.] 차라리 경애왕이 견훤의 공격 징후까지는 알아챘었어도 구체적인 공격 내용은 제대로 몰랐거나, 혹은 견훤의 진격 속도를 잘못된 정보 때문에 오판했을지도 모른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다. 아니면 실제로는 견훤이 왕건의 구원 시도에 퇴각하는 척하다 질풍신뢰와 같은 급습을 시도해 경애왕의 목숨을 빼앗았는데, 견훤을 지나치게 띄워줄 이유가 없는 고려 왕조에서 작성한 역사적 기록이 이런 견훤의 천재적인 전략 전술을 감추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할 수 있다. 사실 '''술 퍼마시다 망했다는''' [[의자왕]]의 이미지와도 겹치는데, 이를 고려하면 당대 후백제 측의 프로파간다가 경주 초토화로 인해 교차검증되지 않은 채, 혹은 신라 멸망의 당위성을 보여주려는 고려 정부의 정치적 의도 하에 무비판적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가운데 어느 쪽이 맞을지는 각자 알아서 판단해야 할 일. 경애왕이 세상을 떠난 후 간만에 등장한 박씨 왕조는 15년 만에 허무하게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다시 신라에는 김씨 왕조가 들어섰으니, 즉위한 이는 바로 신라 최후의 왕 [[경순왕]] 김부였다. 이런 사실 때문에 후백제가 신라 내부의 이러한 갈등을 알고, 김씨와 손을 잡아 경애왕을 제거했다는 가설 또한 제기된다. 실제로 선왕 [[경명왕]] 때는 김씨의 반란 사건도 있었던만큼 박씨가 뜬금없이 재등장해 김씨를 밀어내고, 대를 이어 왕을 하는 것에 대해 남아있던 김씨들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건 분명하다는 것이다. 다만 김씨가 견훤과 내통해 경애왕을 제거했다는 설은 반론도 만만치 않다. 첫째로는 박씨 세력과 김씨 세력의 대립이란 것도 어디까지나 추론일 뿐이지 직접적 사료는 없으며, 둘째로는 경순왕이 즉위 직후 경애왕을 위해 통곡하고 장사지내는 모습, 셋째로는 견훤에 의해 옹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경순왕은 전대 박씨 왕들과 마찬가지로 친고려 반후백제 정책을 계승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전에도 견훤이 전격적으로 신라 영토를 침탈했던 건 김씨 족단이 반란을 일으켰던 순간이었고, 이후에도 견훤이 서라벌 상황에 대단히 민감하게 반응하며 신라 영역을 헤집은 건 분명하다. 적어도 견훤에게 서라벌 내 동조자가 있었을 개연성은 매우 높고, 경순왕마저도 일단은 살아남기 위해 즉위한 후 얼마 동안은 친견훤 반왕건 정책을 펼쳤었다. 경순왕의 행적을 보면 경순왕이 경애왕 살해 및 견훤에 대한 영합에 찬성했을 확률은 높지 않지만[* 영합하지 않았다고 단정짓기는 어려운 게, 견훤에게 우호적이었다가 그가 서라벌에서 깽판을 치는 것을 보고 나서 입장을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 경애왕을 장사지낸 것도 입장을 바꾸고 나서 선왕을 예우하는 차원이었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적어도 신덕왕계 왕실에 대해 반감을 품은 김씨 족단 입장에선 무슨 수를 써서든 신덕왕계 세력을 서라벌 내에서 완전히 뿌리 뽑고 싶어했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아무튼 신라 내부 갈등구도를 묘사하는 것이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기에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도 김씨 세력의 일부인 [[유염(태조 왕건)|유염]]과 김응겸이 박씨 왕실을 제거하기 위해 견훤을 끌어들인 것으로 묘사된 바 있다. [[경순왕]] 김부의 어머니는 [[경명왕]]과 경애왕 어머니의 동생으로 3명은 모두 [[헌강왕]]의 외손(外孫)이다. 따라서 경순왕은 경애왕 사후 가장 가까운 근친 중 하나였다. 또한 견훤에게 수도가 약탈되면서 경애왕과 동성(同姓)인 박씨 일족들이 타격을 받은 영향도 있을 것이지만, 경순왕 김부의 즉위는 당시로서는 정통성 있는 즉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