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애왕 (문단 편집) === 견훤은 정말 왕후를 겁탈했는가? === 경애왕의 왕후에 대해선 자세한 기록이 없으며, 그나마 있는 기록이 [[견훤]]이 왕후를 강간했다는 것이다. 일단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에는 다음과 같은 서술이 있다. >萱又縱其兵,剽掠公私財物略盡,入處宮闕,乃命左右索王。王與妃妾數人在後宮,拘致軍中。逼令王自盡,强淫王妃,縱其下,亂其妃妾。 >견훤이 또한 병사를 풀어 공사의 재물을 모조리 노략질하고, 궁궐에 들어가 좌•우에 명해 왕을 찾도록 하였다. 왕과 비첩은 후궁에 있다가 군사들에게 붙들렸다. 이에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도록 하고, 왕비를 강간하였으며, 아랫사람을 풀어 경애왕의 비첩들을 강간하도록 하였다. >ㅡ《[[삼국사기]]》-경애왕- 이 기록이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에 의해 쓰였음을 생각하면 견훤의 잔혹성을 필요 이상으로 과장시켰을지 모른다는 추측은 해볼 수 있다. 왕건을 위해 견훤은 깎아내려져야 했는데 그 일환이 이런 기록이라는 것이다. 이런 잔혹한 행위는 삼국시대에 신라가 사비[[백제]]에게 저지른 일에 대한 복수의 일환이란 해석도 일부 있다. 실제로 과거 백제의 [[성왕(백제)|성왕]]은 비장 도도에게 [[참수]]된 머리가 신라의 북청 계단 아래에 묻혔다는 썰이 전해지고 있었고[* 다만 이 일화를 언급한 《[[일본서기]]》 구절을 보면 말 그대로의 사실이 아니라 당시에 떠돌던 '그런 소문이 있다'는 정도 기록이다. 성왕은 신라 [[진흥왕]]과 한때 정략결혼으로 맺어진 관계이기도 하고, 이후 처단 과정에서도 왕으로써 예의를 차려줬다는 부분을 보면 계단 아래 목을 묻어 모욕을 줬다는 일설 부분과 앞뒤가 맞지 않다.] [[의자왕]]은 항복 직후 [[태종 무열왕]]과 제장들에게 술 시중을 들어야 했으며, 의자왕의 태자 부여융은 [[문무왕]] 김법민이 침을 뱉기까지 했다. 이런 역사적 경위에 따라 [[견훤]]도 신라를 정벌한 후 "[[의자왕]]의 한을 씻었다"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견훤은 옛 백제 지역 출신은 아니었으나, 그 당시에는 어디까지나 백제 왕이었고, 그 신분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가 그저 지지 기반인 백제 유민들에게 뭔가 보여줄 만한 보복 행위가 필요해서 억지춘향으로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고려하더라도 경애왕의 증외조부인 [[경문왕]](제48대) 시기에 태어나 외조부 [[헌강왕]](제49대)을 섬긴 '''신라 정규군 장수'''였던 견훤이, 다소 과도하다 여겨질 정도로 신라 박씨 왕실에 치욕적인 굴욕을 그렇게까지 강요한 건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긴 하다. 정략적이고 정치적인 부분으로 따지면 왕성 서라벌 약탈까진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있긴 해도 경애왕을 겁박해 자살하게 만들고, 왕후를 강간한 건 다소 불필요한 만행이었던 건 사실이다. 이것은 백제에 대한 복수나 정치적인 쇼보다는, 견훤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과 분노가 더 이유가 컸다고 보인다. 그전까지 경애왕이 적극적으로 뭔가 해보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꽤 성과를 거두었으며, 이런 일련의 사건들을 견훤이 겪으면서 꽤 많이 낭패를 보았던 건 사실이다. 백제니 신라니 뭐니 하기 이전에 개인적으로 몹시 약이 올라 격앙해있었을 가능성이 크단 얘기. '''이런 개인적인 큰 분노와 적개심에, 나름 백제의 왕으로서 백제의 복수를 한다는 쓸만한 합리화의 명분이 더해져 행동의 브레이크가 망가져 버린 걸로 보인다.''' 이 기록을 뒤엎을 수 있는 사료는 현재까진 없다. 견훤이 경애왕을 죽인 후 신라를 무너트리는 게 아니라 김씨인 [[김부]]를 [[경순왕]]으로 추대해 세웠으니 백제 유민에게 잘 보이려 한 행동으로 보기 어렵다는 의견은 더욱 더 설득력이 적다. 신라에 대한 복수라면 이미 경애왕을 살해했을 때 충분히 차고 넘치도록 했던데다, 그대로 신라를 접수하기엔 왕건이 이끈 고려 대군이 바로 육박해있어 당장은 시간이 너무나도 없었다. 경애왕이 [[박씨]]므로 과거 백제 왕들에게 모욕을 주었던 신라 왕들과 관계가 없다는 얘긴 더욱 너무한 소리. 경애왕은 헌강왕의 외손자였던데다, 박씨와 김씨는 오래도록 통혼과 근친혼으로 엮여 있어 그렇게까지 다른 집안도 아니었다.[* 학자들의 추정으론 박, 석, 김 세 가문은 서로 통혼을 통해서 박성내에 박씨, 석씨, 김씨 이렇게 같은 가문내 다른 '씨'로 취급되었을 것이라 여기기도 한다.] 일단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그의 왕후를 강간했다는, 남편을 죽이고 그 아내를 그 자리에서 취했다는 내용은 워낙 성적으로 자극적인 내용이라 믿기 힘들어하는 현대인이 많다. 이와 같은 행동은 동양사에서는 사례가 없는 막나가는 행동이긴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이 일화는 오히려 설득력이 높다. 견훤이 경애왕 때문에 겪어야 했던 정복사업의 차질은 7년인데, 7년이 짧다면 짧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본인이 살아있을 때 모든 걸 이뤄야 한다고 생각하던 60대 노인의 관념으로는 엄청나게 손해본 세월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그러니 경애왕에 대한 그의 분노는 '''백제니 신라니 이전에 개인 견훤이 인간 박위응에게 품은 과도한 적개심과 격앙이 가장 비중이 높았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신라 왕실을 위한 변호를 하자면, 교과서에서 흔히 나오는 진골 독주체제에 대한 [[6두품]] 이하 지식인들의 이탈이나 지방 출신 장수의 출세 한계 탓에 견훤이 신라 체제에 미움을 가졌을 거라고 추측하는 것인데, 실제 당대 현실은 매우 다른 얘기를 하고 있다. 견훤은 단순한 지방 출신이 아니라 눌지-자비-소지 등 눌지계 왕실이 3대에 걸쳐 왕실 직할령으로 개척한 추풍령 일대 출신이었고, 바로 그 빽으로 신라 왕궁 근위대에 입대해서 매우 빠른 출세를 경험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견훤은 반란 일으키기 직전에는 서남해 방수군 비장이었는데 이 자리 또한 오늘날 기준 원스타다. 즉 견훤은 적어도 골품제 한도 내에선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아온 것으로, 때문에 객관적으로 봤을 때 딱히 신라가 그를 내쳤다고 보긴 어렵다. 도통을 자처한 걸 신라 왕실이 받아주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런 관직 자체가 신라사에서 사례가 없었고, 신라 왕실이 견훤의 천재성을 우리 같이 미래시로 보고 알 수 없지 않은 이상 그에게 전례를 어겨가면서까지 그런 대우를 해줄 필요는 없었다. 다만 경애왕 때문에 몇 년에 걸쳐 신라 공략이 지지부진해 쌓인 스트레스를 돌이켜본다면, 그 신라 체제의 최정점인 왕과 왕비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처사를 강요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 이렇게 자신이 손에 쥔 권력을 재확인하기 위해 불필요할 정도의 가혹행위를 일삼는 경우는 그리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모습이기도 하고. 견훤과 완벽히 비슷한 사례로 [[칭기즈 칸]]이 있다. 칭기즈 칸이 살았던 몽골에서도 아내를 빼앗거나 훔치는 관행은 있을지언정 승자가 패자의 아내를 능욕한다는 사례는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유독 칭기즈 칸과 나이만부의 타양칸의 모후에 대해서만 해당 일화가 있다. 타양칸의 모후가 칭기즈 칸과 카마그 몽골부를 여러 차례 골탕먹이고 심한 모욕감을 여러 차례 준 게 원인으로, 견훤 또한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짓을 저질렀을 수 있다. 견훤이 일시적으로 서라벌을 기습 점령했다고 하더라도, 그건 점령 과정이지 견훤이 서라벌을 점령한 지 하루도 못 되어 바로 나와야 했을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서라벌의 무기 만드는 시설을 부수고, 정예병을 압송하며, 서라벌 사람들 일부를 후백제 수도 전주로 보내는 조치 등이 이뤄졌는데 그런 일들을 해낼 정도 시간은 있었으니, 서라벌 궁정 자체를 초토화하며 박씨 왕실에 극도의 모욕감을 안기는 행태를 저지를 시간은 차고 넘치도록 많았다. 적진 한복판이든 뭣이든 적어도 그 상황에서 통일신라의 군사적 유산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후백제군에게 감히 도전해올 신라군은 어디에도 없었고, 유독 경계해야 했을 왕건의 고려군 본대는 여전히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분 단위로 급하고 말고할 상황은 절대 아니었다. [[김부식]]이 작성했다는 점에서 신라계인 그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간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있으나 김부식은 어디까지나 신라계니 뭐니 이전에 고려의 신하로서 《삼국사기》를 서술했고, 《삼국사기》를 김부식 혼자 전체를 서술한 것도 아니며 어디까지나 고려 임금 인종의 확인을 거친 관찬 사서였다. 김부식이 일부러 후백제를 격하하려고 마음먹었다 해도 신라의 왕후가 백제 왕이라지만 한때 신라군 장수였던 늙은 역적에게 강간당했다는 얘긴 김부식이 정말로 신라계로 정체성이 강했다면 오히려 삭제하고 싶었을 치욕적인 일화이다. 견훤은 휘하 장병들에게 서라벌 궁정의 후궁들 및 시녀들을 겁탈하게 했다는데 이 또한 한국사는 물론이고, 동양사에서도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모욕 행위다. 이렇게 사례를 찾아보기 힘든 센세이셔널한 만행이 김부식 혼자만의 상상에서 나온 창작일 수 있을 개연성은 0에 가깝다. 당시의 과장된 야사를 그대로 적었을 수 있으나, 신라계라는 이유로 곡필을 할거라면 견훤의 만행도 만행이지만 경애왕부터 나라 망하는데 포석정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놀던 [[암군]]으로 기록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여간 이러한 [[복수]]는 견훤에게 7년 묵은 한을 쑥 내려가게 하는 스트레스 해소이자,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서라벌에서의 모든 정치행위를 좌지우지하는 최강의 권신 지위를 확인하는 숙원 해소였다. 신라사에는 많은 굴곡이 있었고 전기의 [[실성 마립간]]과 [[진지왕]], 후기의 [[애장왕]]과 [[민애왕]]처럼 살해당하거나 쫓겨난 임금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전 망한 적국을 부활시키까지 한 권신에게 아무 것도 못해보고, 임금부터 가장 지위 낮은 시녀들까지 몸까지 빼앗기며 철저하게 능욕당한 사례는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한 만행의 이야기는 신라인들의 후백제에 대한 저항 의지를 굳게 했으며, 신라에게 별 원한이나 악감정은 없었던 [[패서]] 호족들의 동정심을 크게 자극하게 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사항이 현실로 드러나 왕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려면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본문과는 관계 없지만 어디선가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을 마시며 놀다가 지은 <번화곡>(繁花曲)이 전한다. 진짜로 경애왕이 이런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67629|#]] >기원실제혜이사동(祇園實際兮二寺東) >양송상의혜나중(兩松相依兮蘿中) > 회수일혜화만오(回首一兮花滿塢) > 세무경운혜병몽롱(細霧輕蕓兮幷濃) >---- >기원정사[* 인도 마칼타국의 수달장자가 부처님([[석가모니]])을 위해 세운 절의 이름을 딴 것.]와 실제사, 두 절의 동쪽에 > 소나무 한 쌍이 등넝쿨 속에 기대 있도다. > 머리 들어 한 번 바라보니 꽃이 언덕에 만발했는데, >옅은 안개와 가벼운 구름이 둘 다 몽롱하구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