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제계획/대한민국 (문단 편집) === 제4차 경제·사회 개발 5개년 계획 === 1977년 ~ 1981년 공공/상업 차관 73억달러 도입 연평균 경제성장률 5.8% 연평균 수출증가율 22.5% 연평균 수입증가율 24.4% >1차 석유파동의 충격으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후퇴 국면은 1975년 여름 최저점에 도달하고 회복 국면으로 접어들어 그해 3분기부터 경기가 빠르게 회복되고 수출도 예상 밖의 신장을 보이고 농업생산도 풍작을 이뤄 국내 경제 활동이 상향 추세를 지속함으로써 한국경제는 다시 고도성장 궤도에 복귀도었다.중화학공업의 수출 증대,중동으로부터의 건설 수익 국내의 왕성한 투자와 소비의 폭발적 증가들이 어우러져 사상 최대의 호황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경제기획원은 이에 고무되어 1976년 하반기 경제 전망 및 대책을 수립해 경제성장률을 대폭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큰 실수였다. 경제기획원,재무부,통화 당국이 합세해 과속 성장에 브레이크를 걸었어야 했는데 [[대한민국 제4공화국|유신 체제]]를 합리화하는 논거로 고도성장을 내세우고 있던 당시의 정치적 분위기 속에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결과적으로 1976년~78년 경이적인 고속성장이 계속되었다. 이 같은 경기과열로 각종 물자가 부족해지는 현상이 표면화되면서 수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고,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는 사태에 직면하게 되었다. >---- > 남덕우[* 4차 5개년 계획을 추진중이었던 1974년~78년 경제기획원장을 맡았다.] 「경제개발의 길목에서」 삼성경제연구소, 170p~171p 1977년 수출 100억 불 계획을 조기 달성했다. 이는 부진한 경공업에 비해 꾸준히 성장한 [[중공업]]의 영향이 컸다. 이해 총수출의 35%를 중화학공업이 차지하였는데, 중화학 공업 생산액이 최초로 제조업 총 생산액의 과반이 된 해이자 제조업 수출의 40%를 최초로 넘긴 해이기도 하다. 그 결과 1980년 수출상품은 총수출 28.6%를 차지하고 있는 부동의 1위 섬유류(1970년엔 전제수출의 40%이상이 섬유류였다)에 이어 11.4%의 전자제품, 10.6%의 철강제품, 3.5%의 선박이 각각 2위, 3위, 5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한국이 캐시카우를 통해 끊임없이 산업구조를 고도화 하였음을 보여준다. 70년대 중공업 화가 얼마나 성공했는지 제조업 성장률은 연간 20%에 달하여 1979년 전체 제조업 비중에서 중공업 비중은 54%가 되었고 그해 공산품 수출에서 중화학 제품의 비중은 48%에 달하여 이같은 변화는 기존 선진강대국들이 50년~100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이었다. 70년대 경제성장이 국민 전체에 잘 뿌려진 증거로, 노동소득분배율은 오일쇼크의 영향에도 불구하고 급락 없이 10년 만에 10% 증가하였고[[https://www.index.go.kr/potal/stts/idxMain/selectPoSttsIdxSearch.do?idx_cd=4016&stts_cd=401601&clas_div=&idx_sys_cd=|#]] 가계저축률은 71년 대비 5.5배나 증가한 15.8%로 증가했으며[*다만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1978년보다 1.8% 하락하였다.] 이것을 넘어서게 된 것은 7년이나 지난 1986년이었다.[[http://www.index.go.kr/potal/stts/idxMain/selectPoSttsIdxSearch.do?idx_cd=4025&stts_cd=402502|#]] 설비투자증가율은 연평균 23%라는 경이적인 수치를 기록하였다.[[https://www.index.go.kr/potal/stts/idxMain/selectPoSttsIdxSearch.do?idx_cd=1055|#]] 살림살이가 이전에 비해 나아졌느냐는 여론조사에서 87%가 긍정하였다[[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10100209201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1-01&officeId=00020&pageNo=1&printNo=17920&publishType=00020|#]] 1962년[* 1차 5개년 계획 발표]~1981년[* 제4차 5개년 계획 종료]까지 1973년[* 물가 상승률이 3.2%였다.]을 제외하면 높은 물가 상승률을 보였는데[* 오일쇼크가 터진 1974년~75년에 25% 1979년~81년에는 18%~29% 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당시로서는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119|인플레이션]]에서 나오듯이 자본과 저축이 빈약해 국토개발과 산업확충에 필요한 막대한 돈을 찍어 투입해야 했던것이다.[* 이를 개발 인플레이션이라 부른다.] 이러한 고도성장을 뒷받침한 설비투자가 과잉투자가 되어 부실기업 정리 및 재고처리를 단행하여 경제성장률이 하락하던 시점에 하필 2차석유파동이 터져 1980년 경제성장률을 최초로 집계한 1954년이래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과 (-1.7%) 30%라는 물가상승률을 기록해 한국경제가 폭망하는 위기감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최규하 정부]]와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정부주도하의 경제정책 전반을 민간경제를 자율성을 크게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환하며 물가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