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시/역사 (문단 편집) == 신라의 천년과 함께한 경주 == 경주는 [[신라]]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도시다. [[고구려]]와 [[백제]]가 계속 수도를 옮겼음을 생각하면 이례적이다. 신라 시대에는 [[서라벌]]이라 불렸다. 신라 전성기 때 서라벌의 호수는 17만 8936호[* [[삼국유사]] "新羅全盛之時 京中十七萬 八千九百三十六戶"]로, 최대한으로 추산해보면 대략 90만의 인구가 나온다. 세계 최대의 양대 도시인 [[시안(도시)|장안]]과 [[바그다드]]의 인구가 100만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대로 믿기는 쉽지 않은 숫자인데[* 학계는 [[통일신라]]의 전체 인구를 최대 400만 명 내외로 추정하고 있는데 전체 인구 400만 명 중 90만 명에 가까운 숫자가 경주와 그 근처에서 거주했다는 것은 역시 전근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수치이다. 일단 한 곳에 집중적으로 밀집된 100만에 가까운 인구를 먹여살릴려면 그만한 엄청난 규모의 인근 [[곡창지대]]와 도로, 각종 시설 등의 인프라가 필요한 터인데 경주와 그 일대에서 이러한 인프라에 관련한 대규모 유적이 발견된 예는 매우 드물다.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라는 높은 [[인구 밀도]]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굶주리지 않고 살았는지 의문이다. 비슷한 대규모 도시인 고대 [[로마]] 등지에서 아직도 무수한 수도시설과 도로 등의 거주편의시설이 남아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의문이 가시지 않는 사실.], 그래서 오늘날의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처럼 도시를 넘어선 근교까지 포함한 것이라는 설, [[골품제]]의 신분 유지를 이유로 [[위장전입|호적만 경주에 두고 지방으로 이주]]한 인구까지 포함한 수치라는 설, 호가 아닌 구(口)의 잘못된 표기로 보고 35만여 명 정도로 파악해야 한다는 설, 당대 농업 개간 능력 고평가하는 관점에서 수도 경주의 면적을 다르게 계산해서 그 정도가 나온다고 보는 설 등이 있다. 그리고 [[통일신라]]가 경주 일대를 중심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던 것을 감안하면 90만 인구는 경주와 경주 일대의 인구를 포함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삼국유사]]에 같이 적힌 고구려 전성기 인구 105만과 백제 전성기 인구 76만도 실제로는 대성산성과 [[평양성]] 지역의 인구와 [[한성]](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 일대의 인구만을 파악한 규모라는 것이 정설이다. 어쨌든 수십만 이상의 인구 규모는 그 당시로서 유례를 찾기 힘든 수치임이 틀림없다. [[일본]] [[헤이안 시대]] 수도 헤이안쿄(지금의 [[교토시|교토]])에는 20만 명의 인구가 살았는데 당시 교토와 경주의 면적이 비슷하고 신라와 일본의 체급 또한 엇비슷하기 때문에 경주 인구 100만설은 더욱 의문이 간다. 신라가 망한 이후 [[고려시대]]에도 한동안은 과거의 영화를 가지고 있었으나 결국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황폐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인지 지금의 경주 시가지는 신라 시대의 경주 시가지와는 지리적으로 좀 차이가 있다. 신라시대의 경주 시가지 중심은 현대 경주 시가지의 남동쪽인데 주로 논밭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황룡사]] 등의 유적지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민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근대에 땅을 파헤치는 콘크리트 건물들이 건설되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점이다. ||[[파일:attachment/gyeongju_old.jpg|width=100%]]|| || 신라시대 경주 시가지의 모형[* 이 모형은 [[경주타워]]에 있다] || 도로와 주택들은 도시계획에 의해 바둑판 모양으로 정돈되어 있었다. 앞 부분에 [[경주 월성]]이 보인다. 단, 월성 안의 건물 배치는 상상일 뿐이다. 월성 북쪽에는 별궁인 임해전이 있으며 그 동쪽에 [[황룡사]]가 있다. 그리고 그 바로 위가 [[분황사]]다. 임해전에 붙어있는 [[안압지]] 등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는 [[통일신라]]시대가 기준인 것 같다. 또, 월성 남쪽 강 건너에 있는 절은 [[인용사]]다. 월성 남북쪽으로는 너비 23m의 [[주작#s-2|주작]]대로가 있고, 그 북쪽 끝에 보이는 건물은 또 다른 신라의 궁궐터인 [[전랑지]](대궁지)다. 다만 이 곳은 현대 경주의 시가지에 포함되어 버렸고[* 현재에도 거주지 및 경주고등학교, [[알천남로]] 일대의 주유소와 이런저런 철물점 등등이 전랑지 바로 옆에 붙어있다. 더 동쪽에는 경주소방서 본부까지 1996년 이전해 현재까지 이어져온다.] 발굴과 연구가 미흡해서 정확한 이름은 불명이다. 아직까지 이름을 알 수 있는 유물이 나오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