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시/역사 (문단 편집) === [[고려시대]] === ||<-16> '''[[고려시대]] 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 || 경주 [br] (慶州)[br](천수 18) ||<|2> → || 안동대도독부[br](安東大都督府)[br](940) ||<|2> → || 동경[br](東京)[br](987) ||<|2> → || 경주[br](慶州)[br](1012) ||<|2> → || 동경[br](東京)[br](1030) ||<|2> → || 경주[br](慶州)[br](1204) ||<|2> → || 동경[br](東京)[br](1219) ||<|2> → || 계림부[br](鷄林府)[br](1308) || 주로 크게는 '''경주'''와 '''동경'''이라고 불렸다. 그 외에도 안동[* 고려 태조가 [[고창 전투]] 이후 작금의 경북 안동시가 생겨났다. 다만, 경북 안동은 경종 4년(980) 영가군으로, 다시 995년에 길주로 고쳐졌다가 고려 말 공민왕 치세에 이르러서야 다시 '안동'대도호부가 되었기에 의외로 겹치는 지명은 아니었다. 더욱이 안동(安東)은 한자문화권에서는 "동쪽을 평안케 했다"라는 보통명사에 가까운 편이었다.], 계림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전 신라시대와 비교하여 면적이 넓어졌다. 지금의 [[외동읍]]에 해당하는 임관군, [[문무대왕면]]에 해당하는 약장현을 통합하였다. 935년(천수 18년) 신라가 [[고려]]에 합병된 이후 [[태조(고려)|태조 왕건]]에 의해 경주(慶州)라고 부르고 [[경순왕]] 김부를 사심관으로 임명하여 이 지역 일대를 통치하게 했다. 이후 [[987년]](성종 6년) [[개경]]([[개성시]]), [[서경(고려)|서경]]([[평양시]])과 함께 고려 3경을 이루고 왕이 가끔 행궁에도 방문했을 정도. 그러나 이후 [[1012년]](현종 3년) [[현종(고려)|현종]]에 의해 경주로 격하되었지만 곧 [[1030년]](현종 21년) 다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하지만 견훤의 서라벌 함락과 이후 경순왕의 개경 상경으로 주민이 많이 유출된 이래로, 적어도 신라 시대에 비해선 인구는 크게 줄었던 게 분명하다. 흔히 [[남경(고려)|남경]]의 설치로 동경이 쇠락했다는 주장이 만연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경주가 동경에서 격하된 주요 이유는 반란이나 관제의 변경 때문이지 남경의 성장 때문이 아니다. 남경의 설치 이후에도 동경으로서의 위상은 거의 유지하였고 1308년 격하될 때는 남경도 같이 격하되었다. >정지상(鄭知常)의 시에, “새벽에 작은 누(樓) 머리에 일어나서, 발[箔]을 걷고 하늘을 쳐다본다. 누 아래는 곧 계림이니, 기괴한 것을 이루 다 셀 수 없고. 늙은 나무에 연기가 부슬부슬, 일만호(一萬戶)에 비꼈네. 흰 구름은 동쪽 산에 날고, 푸른 물은 서쪽 포구로 달린다. 우뚝 솟은 황금절들, 서로 바라뵈며 아침 햇빛 따사롭구나. 반월성(半月城) 가운데 빽빽하게 서 있는, 꽃과 대[竹] 이제는 주인이 가고 없네. >(중략) >멀리 조망하려고 서루(西樓)에 오르니, 처마와 기둥이 날아 춤추는 듯. 남쪽 트인 곳에 인가가 조밀하며, 문물은 신라의 옛 땅일세. 금찰(金刹)들이 인가 사이에 섞여 있어 열에 아홉은 되는 듯. 성적(聖跡)이 세속에 섞여 있어서, 지나가는 손이 구경하기에 바쁘도다. 큰 저택과 아름다운 절들이, 전란(戰亂) 뒤엔 들밭을 이루었구나. >---- > 《[[신증동국여지승람]]》 21권 [[경상도]] 경주부 [[백률사]] 정지상은 고려 중기 [[김부식]]과 동시대 사람이고 이후 기록은 고려 말 14세기 문인 박효수의 시에서 인용한 부분이다. 신라의 왕궁이었던 [[경주 월성]]은 무너져 [[대나무]]와 [[꽃]]이 무성해졌지만 시가지는 거대했고 황금빛 사찰이 빛나 지나가는 사람이 구경하기 바쁜 화려한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몽골 전쟁]]으로 많은 큰 건물들이 폐허로 남은 상황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1204년]]([[신종(고려)|신종]] 7년) [[무신정권]]기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는 바람에 또 다시 경주로 강등되었다.[* 강등된 것도 모자라 경상도의 이름도 바꿔버렸다. 경상도의 경(慶)을 삭제시켜 아예 [[경상도]]를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그러나 [[1219년]]([[고종(고려)|고종]] 6년) 다시 동경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1308년]] 고려의 [[외왕내제]] 체제를 제후국 체재로 개편하라는 원의 압박으로 인해 계림부(鷄林府)로 격하되었다. 당시에 고려의 경(京) 다음으로 고려의 최상급 행정기관인 목(牧)도 제후국 체제로 개편되면서 없어지는 판국이다 보니 부 정도만 해도 나름 위상은 있는 편이었다. 흔히 [[무신정권]] 기간에 [[신라부흥운동]]으로 인해 경주는 서울에 밀려 3경(京)의 위상을 잃었다고 하는데, 위의 표에서도 알 수 있듯이 반란이 일어난지 겨우 15년이 지나 다시 동경이라 불리며 원간섭기에 황제국만 가질 수 있었던 행정구역이 제후국의 위치에 걸맞도록 격하되기 전까지 부수도의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