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주시/역사 (문단 편집) === [[조선시대]] === ||<-4> '''[[조선시대]] 경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 || 계림부[br](鷄林府)[br](1392) ||<|2> → || 경주부[br](慶州府)[br](1394) || [[1392년]] 조선이 건국된 직후, 고려말의 계림부(鷄林府) 지명이 이어지다가 [[1394년]] [[경주부]](府)로 개칭되어 조선말까지 유지되었다. 부(府)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인 부목군현 중 최상위 행정구역으로, 조선 전기에는 전국에 6개만 존재했는데, 고려시대 4경인 개성, 한성, 평양, 경주에다가 조선 왕실인 전주 이씨의 어향인 전주, 함흥이 부로 승격되면서 조선 전기에는 단 6개의 부가 존재했다.[* 조선 초기에는 4개의 부가 있었다가 조선 후기로 가면서 의주, 광주가 추가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전전조 신라의 고도, 경상도의 수부 도시, 유교와 양반 문화의 근거지로서 경주의 위상은 상당히 높았다. 고려시대와 비교하여 지금의 [[경주시]] [[안강읍]], 강동면에 해당하는 안강현, 지금의 포항시 기계면에 해당하는 기계현, 포항시 신광면에 해당하는 신광현, [[경산시]] 자인면에 해당하는 자인현 4현을 속현으로 거느렸다. 조선시대에 특기할 사항으로는 [[이언적]]의 본향으로 지금의 [[양동마을]]로까지 이어지는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는 점이다. 흔히 경주에 널려 있는 불교 유적 때문에 경주 = [[불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유교에서도 꽤나 유서 깊은 지역이다. [[이황]]과 더불어 영남 학파의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이언적]]의 본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주는 양반 문화가 발전한 지역이었다. 양반 문화가 발달했다는 증거로 [[1909년]] 호구 조사의 결과에 있는데, 당시 경주 내에서 양반이 2,599호로 전국에서 양반이 제일 많았다. 인구 비율로 보나 전체 인구로 보나 대도시 중에서는 경주보다 양반이 많은 곳은 '''없었다'''. 이외에도 우리나라의 사상사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동학]]의 탄생지라는 점. [[1895년]] 전국 행정구역 개편 때 [[경주군]]이 되었다. [[1906년]] 기계면과 신광면이 흥해군으로, 죽장면이 청하군으로, 동해면이 장기군으로[* 편입 직후 양북면과 양남면으로 분리.], 외남면(현 울주군 두동면, 두서면)이 울산군에 편입되었다.[* 환원된 양남면과 양북면을 제외하더라도 무려 면적상으로는 현재 포항시 [[북구(포항)|북구]]의 과반, [[울주군]]에서도 작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지역들이 떨어져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큰 면적을 자랑하는 경주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그만큼 주변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 조선시대 행정구역 상으로는 큰 고을일수록 관할지가 넓었기 때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