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혜공주 (문단 편집) ==== 사육신 사건 ==== 세조가 즉위한 지 약 1년 후인 동왕 2년(1456) 6월 1일에 이른바 [[사육신]] 사건이 터진다.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성삼문은 상왕 [[단종(조선)|단종]]도 거사 계획을 알고 있었다고 말하였다. 이 말은 상왕 단종과 영양위 정종에게 몹시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렇지 않아도 복위운동이 일어날까 의심하던 세조와 측근들은 이 사건을 빌미로 그 싹을 자르고자 하였다. 유배 중이던 [[정종(부마)|정종]]를 시종하던 종들은 모두 지방의 관노로 쫓겨났다. 그 뿐만 아니라 [[정종(부마)|정종]]의 모든 재산이 몰수되었다. 혹시라도 [[정종(부마)|정종]]과 상왕 단종 사이에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인맥과 자금을 차단하려는 조치였다. 또한 [[정종(부마)|정종]]의 유배지가 경기도 통진에서 전라도 광주로 바뀌었다. [[정종(부마)|정종]]을 상왕 단종이 머무는 한양에서 멀리 떨어뜨려 서로 접촉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세조는 경혜공주가 원한다면 [[정종(부마)|정종]]을 따라 광주로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경혜공주에 대한 마지막 배려였다. 이렇게 해서 경혜공주는 [[정종(부마)|남편]]을 따라 수원, 통진에 이어 전라도 광주까지 가게 되었다.[* 경혜공주는 [[문종(조선)|아버지]]와 [[세종(조선)|할아버지]]의 초상과 단종의 강제 양위 등 연이은 불행으로 인해 계속 각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없었는데, 경혜공주가 23살에 광주로 유배 후, 이후 25살이 되던 해에 혼인 9년만에 유배지에서 첫 임신 후 장남 [[정미수]]를 출산했다.] 광주에서는 통진에 비해 감시가 훨씬 심했다. 집 주변으로 담장과 난간이 높직하게 둘러처져 있었으며 감시병들도 많아졌다. 게다가 남자종은 부릴 수 없었고 여자종 세 명만 부릴 수 있었다. 남자종들을 시켜 무슨 음모를 꾸밀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단종(조선)|단종]]은 상왕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유배당했고 세조 3년(1457년) 10월 그 곳에서 죽는다. 단종 사후 [[정종(부마)|정종]]에 대한 감시는 더더욱 강화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