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혜공주 (문단 편집) ==== 비구니가 되다 ==== 실록에서는 [[정종(부마)|정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으며 무척 가난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종5년 1월 1일 4번째 기사] 당시 몹시 가난하여 세조가 노비를 돌려주고 내수사로 하여금 집을 지어주게 했다는 기록이 사관에 의해 작성되었다. 세조와 [[정희왕후]]도 죽은 단종과 노비가 된 경혜공주에 대한 동정 여론을 의식하였기 때문에 그 해에 바로 서울로 불러들였으며, [[정희왕후]]가 공주의 아들 [[정미수]]를 궁궐로 데려와 길렀고, 경혜공주는 딸을 출산한 이후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다. 경혜공주의 입장에서 보면 친동생 단종이 왕권을 뺏긴 것만으로도 억울하기 짝이 없는데, [[단종(조선)|동생]]은 살해당하고 [[정종(부마)|남편]]은 역모죄로 거열형을 당했으니 삶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살아야한다고 생각한 것은 3살, 1살된 어린 아이들 때문이었다. 어머니로서 어린 자녀들을 두고 죽을 수는 없었으나, 아이들과 같이 궁궐에 가자니 세조와 마주치는 게 죽기보다 싫었던 경혜공주는 비구니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원수 소굴이나 다름없던 궁궐에 자식들을 맡긴 건 어머니 [[현덕왕후]]의 친정노비이며 경혜공주의 유모였던 백어리니의 도움이 컸다. 백어리니는 당시에 [[성종(조선)|자을산군]]의 유모였는데 정희왕후 윤씨와 함께 "자식들을 위해 왕을 용서해야한다"라고 설득했을 거라 추측된다. 딸 출산 후 [[정업원]]에 출가했다. 당시 27살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