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희궁 (문단 편집) == 건축물 == || {{{#gold ''' 사진 '''}}} || {{{#gold ''' 설명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Heunghwamun.jpg|width=100%]]}}} ||'''[[경희궁 흥화문|흥화문(興化門)]]'''[br]경희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 우진각지붕식 단층기와집에 단층 구조로 다른 궁과는 차별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원래는 금천교 동쪽, 즉 현재의 구세군 빌딩자리에서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1932년 일제가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의 정문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흥화문을 뜯어갔었다. 광복 이후 박문사는 철거되고 그 자리에는 영빈관에 이어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계속해서 엉뚱한 곳의 정문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다가 1988년 경희궁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흥화문을 경희궁터로 옮겨 왔는데 원래의 자리에는 이미 구세군빌딩이 세워져 있어서,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했다. 원래자리에는 흥화문터를 알리고 있는 안내비석이 서 있고 그 바로 뒤 금천교와 서울역사박물관이 있어 거기서 부터 숭정전까지 거리로 경희궁의 규모를 가름할 수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숭정문.png|width=100%]]}}} ||'''[[경희궁 숭정문|숭정문(崇政門)]]'''[br]경희궁 숭정전의 정문으로 높은 기단을 쌓아 월대를 만들었고 왕궁으로서 위엄을 갖추고 있다. 숭정문(崇政門)으로 오르는 계단에는 봉황을 새긴 답도를 만들어 왕궁의 권위를 상징하고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gyeonghuigung06.jpg|width=100%]]}}} ||'''[[경희궁 숭정전|숭정전(崇政殿)]]'''[br]경희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규모로 건립되었다. 경희궁 창건공사 초기인 1618년(광해군 10)에 세워졌으나 1926년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일본인 사찰인 조계사에 팔았는데, 현재는 [[동국대학교]] [[정각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현 위치의 숭정전은 경희궁지 발굴을 통하여 확인된 위치에 발굴된 기단석 등을 이용하여 복원한 것이다. 숭정전 내부 당가에 용상을 설치했는데, 그 뒤로 곡병과 일월오봉병을 두었다. 우물천정에는 마주보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새겨두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dunggu.com/gyeonghuigung15.jpg|width=100%]]}}} ||'''[[경희궁 자정전|자정전(資政殿)]]'''[br]경희궁의 편전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정방형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1617년(광해군 9)에 건립되기 시작했으며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숙종이 승하한 후에는 빈전으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선왕들의 어진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8~1910년 사이에 경희궁의 몇 안남은 전각들조차 훼손될 때 덩달아 헐렸다가 해방 후 경희궁지 발굴을 통해 복원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hyulimbook.co.kr/%ED%83%9C%EB%A0%B9%EC%A0%84(%EC%97%AC%ED%96%89%ED%8E%B8%EC%A7%80).jpg|width=100%]]}}} ||'''[[경희궁 태령전|태령전(泰寧殿)]]'''[br]경희궁의 전각 중 하나로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영조 당시 중수되어 영조의 [[어진]]을 봉안했고 영조가 붕어한 후 혼전으로 이용되었다.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던 경희궁 전각 중 하나였으나 일제가 경희궁의 남은 전각 5개 매각할때 같이 매각되었다가 해방 후 발굴, 복원되었다. 복원 이후에는 영조의 진전이었던 점을 반영해 영조 [[어진]] 모사본을 봉안했다. 이 전각의 뒤편에 자연스럽게 형성된 큰 바위가 있는데 서암(瑞巖)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바위다. 원래는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해서 왕암(王巖)이라고 불렀고 이 때문에 [[광해군]]이 이 자리에 경희궁을 지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현재 이름인 서암은 [[숙종(조선)|숙종]]이 상서로운 기운이 서린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왕암을 서암으로 고쳤다고 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gnews.naver.net/l_2016081501001812600150601_99_20160814220805.jpg|width=100%]]}}} ||'''방공호'''[br]태평양 전쟁 중이던 1943년 말경[* 당시 경성중 학생이던 최준희의 2003년 증언([[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410010325262560011&mobile=false|#]])] 경성중앙전신국의 피폭에 대비하여 중요 통신 유지를 위해 설치된 지하 전신국이다. 왕과 왕비의 침전인 융복전과 회상전이 있던 자리에 콘크리트를 이용해 만들었다고 하며 당시 체신국 직원들과 경성중학교의 근로보국대 학생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발파작업은 조선군사령부 공병대가 담당했고, 작업이나 실무 행정은 전부 체신국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서울특별시는 2003년에 [[방공호]]를 폭파철거하려던 계획을 수정하여 전시(戰時)기념관이나 박물관으로 개조하려고 했고, [[명지대학교]]에 연구용역을 의뢰했다. 2004년에 연구용역팀이 역사현장으로 보존하자고 피력하여 서울시와 문화재청이 협의를 했으나 예산 문제 등으로 수년간 미루다가 뜻을 못 이뤘다.([[https://m.khan.co.kr/view.html?art_id=200904210156315&nlv|#]]) 2013년 "경희궁지 종합정비기본계획"을 발표하며 철거 후 융복전과 회상전을 복원할 계획이라 밝혔다가, 돈이 많이 든다며 방공호를 [[서울역사박물관]]의 근현대유물 수장고로 활용하기로 하고 2014년 수장고 준공을 계획했다. 그러나 현재는 그냥 방치된 상태. 대중에게는 [[MBC]] [[느낌표(MBC)|느낌표]]의 위대한 유산 744434를 통해 처음 알려졌으며, 해당 시설에 방문한 시민의 블로그 게시물을 보면 대충 만든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다.[[http://blog.naver.com/rodianeee/220197109038|#]]|| [각주] [[분류:경희궁]][[분류:대한민국의 사적]]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