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희궁 (문단 편집) === 조선 후기 === 연원은 1616년 [[광해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당 부지는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의 저택이었지만 왕기가 흐른다 하여 광해군이 그 부지를 몰수하여 별궁인 경덕궁(慶德宮)[* 경희궁의 원래 이름]을 짓게 했다. 1617년 착공해 1620년 완공되었다. 건립 이래 140여년간 경덕궁이라 불리어 왔으나, 영조가 1760년(영조 36년)에 궁궐 이름인 '경덕(慶德)'이 정원군의 시호인 '경덕(敬德)'과 음이 같다고 하여 '경희궁'으로 고쳤고 이 이름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동궐로 불리던 것처럼 경희궁은 서궐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조선 후기 동안 정궁 [[창덕궁]]+[[창경궁]]과 더불어 양궐체제하의 이궁으로써의 역할을 했다. 건립된지 3년만인 1623년과 1624년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으로 인해 [[창덕궁]]과 [[창경궁]]이 연이어 전소되자 왕의 거처로 바뀌어 [[창경궁]]이 중건될 때까지 임시 정궁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부 전각은 헐려 [[창덕궁]]과 [[창경궁]] 중건 공사에 사용되기도 했다. 이후 조선 후기에 많은 왕들이 경희궁을 이궁으로 애용했다. 특히 이곳에서 태어난 숙종은 경희궁에 대대적인 개보수를 실시했다. 이후 [[영조]]는 치세의 거의 절반을 경희궁에서 보냈다고 한다. 또한 [[정조(조선)|정조]] 즉위식도 이곳에서 거행되었다. 다만 19세기에 이르러 경희궁은 그 사용이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는데, [[헌종(조선)|헌종]]과 [[철종(조선)|철종]]은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창덕궁에서만 머물렀다. 고종 즉위 직후에는 경복궁 중건 공사를 위해 5개의 전각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훼철되면서 사실상 궁궐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