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계계군벌 (문단 편집) === 구 계계 === 계계군벌은 비적 출신의 [[루룽팅]]이 시작이다. 루룽팅은 원래 중월국경에서 비적질을 하다가 청나라 조정에 귀순한 이후 1911년 신해혁명에 참여하여 광서성 부도독에 추대되었으나 1913년 [[계축전쟁]]에서 위안스카이를 도와 혁명군을 진압하며 광서성의 실력자로 자리잡았다. 구 계계군벌의 본격적 시초는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에 즉위하려 하자 운남에서 [[차이어]], [[탕지야오]], [[량치차오]] 등이 [[호국전쟁]]을 일으켰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서성의 [[루룽팅]]은 사태를 관망하다가 호국군에 합세하여 광서성의 독립을 선포, 광동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계계군벌 산하에는 2개 사단, 2개 여단의 병력이 있었으며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루룽팅은 양광순열사로 임명되어 그 휘하의 계군 1사단장 [[천빙쿤]]이 광동독군에, 2사단장 [[탄하오밍]]이 광서독군에 임명되면서 구 계계군벌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1917년 [[부원지쟁]]과 [[장훈복벽]]을 거쳐 쑨원이 [[1차 호법운동]]을 벌이자 계계군벌은 [[탕지야오]]의 [[전계군벌]]과 함께 쑨원을 초청하여 광저우에 호법정부를 수립하게 했으나 정작 자신들은 원수에 추대되고도 취임하지 않는 등 호법운동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는 구 계계군벌이 어디까지나 호법을 세력확장의 구실로만 사용할 뿐이었기 때문이었다. 1917년 [[호법전쟁]]이 터지고 원하는 바를 얻은 서남군벌들은 쑨원에 비우호적인 정학회의 [[천춘쉬안]]과 결탁하여 쑨원을 축출하고 [[북양군벌]]과 화의를 맺었다. 하지만 광저우를 중심으로 전횡하다가 동맹이었던 탕지야오와의 관계도 결렬되는 등 고립되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1920년 [[쑨원]]이 [[2차 호법운동]]을 일으키자 민남에 주둔하던 광동군벌 [[천중밍]]이 이에 호응하여 월인치월의 구호를 내세워 루룽팅을 광동에서 축출하면서 계계군벌의 위세는 축소되었다. 이후 루룽팅은 광서성을 중심으로 보신정책을 취하였으나 1921년 쑨원이 광저우에서 비상대총통에 취임하자 [[우페이푸]]와 [[차오쿤]]의 [[직예군벌]]의 사주를 받고 광동을 공격했다가 천중밍의 반격에 도리어 패하여 광서성의 상당수 지역이 천중밍의 손에 들어갔다. 이후 광서성은 심홍영, 유전환, 리쭝런 등의 계계군벌들이 할거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 힘을 얻은 것은 과거 루룽팅 휘하의 심홍영의 부하였던 리쭝런과 바이충시 등이었다. 구 계계군벌은 [[천중밍]]과 연대하여 국민당을 치고자 했으나 리쭝런, 바이충시, 황소횡 등이 1922년 광서자치군을 조직하여 루룽팅에게 대항하기 시작하면서 구 계계와 신 계계의 패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루룽팅은 직예군벌의 지원을 받아 광서성을 탈환하려 했지만 1924년 패배하고 하야를 통전한 후 상하이로 도주했다. 1925년 신 계계가 광서성을 통일하면서 구 계계군벌은 완전히 몰락했다. 유진환 등 독자적으로 활동하던 일부 계계군벌들도 있는데 이들은 1923년 쑨원의 [[천중밍]] 타도 선언에 호응하여 서로 토역군 사령관에 취임, 천중밍을 몰아내고 3차 광동정부를 수립하는데 일조했지만 [[천중밍]], [[탕지야오]], [[돤치루이]] 등과 결탁하여 딴 마음을 품다가 1925년 전계군벌의 [[양시민]]과 합쳐 [[1925년 객군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