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축전쟁 (문단 편집) === [[쑹자오런 암살 사건]]과 [[선후대차관 사건]] === [[1913년]] [[4월 8일]] [[중화민국]] 초대국회가 개막했다. 초대국회를 선출하는 선거에서는 국민당이 약진하여 참의원 정, 부의장에 국민당 소속 [[장쥐]], [[왕정팅]]이 당선되었고 중의원 596석 중 269석, 참의원 274석 중 123석을 차지하는 등 절대 다수의 의석이 국민당에게 돌아갔다. 이에 대통령 중심제를 주장하며 국민당에 대립하고 있던 임시 대총통 [[위안스카이]]는 당황했다. 국민당의 영도자이며 국민당 이사장 대리를 맡고 있는 [[쑹자오런]]은 내각 책임제, 지방자치제, 중의원에서 국무총리 선출, 헌법 제정을 주장하며 위안스카이에게 맞섰고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와 총리 [[자오빙쥔]]은 쑹자오런과 적대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국무총리 자오빙쥔을 시켜 쑹자오런을 제거할 것을 지시했고 자오빙쥔은 비서 홍술조에게 쑹자오런 암살을 맡겼다. 홍술조는 무사영을 매수하여 1913년 3월 20일 밤 10시 40분 쑹자오런이 베이징으로 가기 위해 상하이역에 나타나자 저격했다. 쑹자오런은 3월 22일 사망했다. 4월 24일 무사영이 체포되어 사건의 전말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위안스카이는 무사영과 무사영을 매수한 응기승 역시 암살해버렸고 홍술조가 독일 조계지로 달아나는 것을 방관했다. 또한 위안스카이는 국민당을 견제하기 위해 집익사, 정우회, 계축동지회 등의 조직을 지원하여 국민당 분열 공작을 획책하는 한편, 공화당, 통일당, 민주당이 국민당에 대항하기 위해 1912년 4월 24일 합당을 결정, 5월 5일 진보당을 결성하자 여기에 자금을 지원했다. 진보당은 대총통 중심제를 주장하며 내각제를 주장하는 국민당에 맞섰다. 이어 1913년 4월 26일 국회의 허락 없이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러시아 5국 은행단으로부터 염세를 담보로 2500만 파운드의 차관을 빌리려 한 선후대차관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왕정팅]]과 [[장쥐]]의 면담 요구를 일방적으로 거부하고 국민당 의원들의 저지를 무시하고 협정을 체결해버렸다. 쑹자오런 암살과 선후대차관 사건이 있자 국민당과 위안스카이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위안스카이의 자금 지원을 받던 [[량치차오]]의 진보당은 일단 차관을 승인하였으나 위안스카이가 [[오스트리아-헝가리]]로부터 350만 파운드의 차관을 또 빌려온 것이 밝혀지면서 정부 탄핵 여론이 일었다. 위안스카이는 총리 자오빙쥔과 재정부장 주학희를 경질하여 사건을 마무리하려 했다. 자오빙쥔은 직예총독으로 좌천되어 1914년 2월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더군다나 1913년 5월, [[러시아 제국]]과 외몽골 문제로 협약을 맺은 것 역시 문제가 되었다. 외몽골은 [[복드 칸]]이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사실상의 독립국 상태였고 러시아 제국의 몽골의 독립을 지원했다. 중화민국은 몽골의 독립을 불허하고 있었으나 1913년 5월 20일, 중러선언이 발표되면서 외몽골의 자치를 인정하게 되었다. 진보당은 외몽골이 실질적으로 중국의 지배를 벗어났으니 중러선언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으나 국민당은 이를 승인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국민당의 반발로 중러선언은 국회에서 부결되었지만 선후대차관 사건과 마찬가지로 위안스카이는 국회의 거부를 묵살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