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축전쟁 (문단 편집) === 3독 해직 사건 === 사태가 이쯤되자 국민당 내부에서 무력으로 위안스카이를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에 체류 중이던 [[쑨원]]은 나가사키에서 쑹자오런 암살 소식을 듣고 이를 철저히 추궁하도록 했다. 위안스카이가 황싱이 자신을 암살하려는 공안사건을 조작하는 한편 선후대차관 사건으로 국민당을 무시하자 쑨원은 무력 토벌을 결심하고 일본 정부를 설득하여 위안스카이를 고립시키고 [[후한민]], [[탄옌카이]] 등이 이끄는 병력을 바탕으로 혁명을 일으키자고 주장했지만 [[황싱]], [[후한민]]이 법을 통해 위안스카이를 타도하자고 반대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이미 무력을 동원하여 국민당을 분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13년 기준으로 전국의 21명의 도독 중에서 위안스카이 지지파가 12인, 국민당 지지파가 9인이었는데 위안스카이는 강서도독 [[리례쥔]], 안휘도독 백문울, 광동도독 [[후한민]], 호남도독 탄옌카이 등이 자신에게 격렬히 반대하는 것을 알아 경계하고 있었다. 1913년 5월 5일 위안스카이는 [[리춘]]이 지휘하는 제6진을 하남성 신양으로 파견했고 5월 6일 총통부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하여 남방작전을 정했다. 그리고 [[장쉰]]의 제5진도 진포선에 배치하여 강소와 강서의 국민당 진압을 준비했다. 5월 15일 위안스카이는 황싱이 가지고 있던 육군상장 계급을 취소해버리고 섬서도독 장봉홰, 산서도독 [[옌시산]], 직예도독 펑궈장을 시켜 황싱을 비애국자라고 공격하게 했다. 5월 21일, 위안스카이는 비서장 [[량스이]]를 시켜 국민당에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을 전했다. >"지금 보니 쑨원과 황싱은 난동을 피우는 것을 본업으로 삼고 있다. 이쪽에서도 난동이고 저쪽에서도 난동이다. 나는 4억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중임을 맡은 사람으로 이런 난동을 내버려둘 수 없다. 나는 정치, 군사 경험 면에서 또 외교적 신용 면에서 누구 못지 않다고 자신한다. 만약 그대들의 능력이 나를 대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 역시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만약 그대들이 감히 다른 정부를 조직한다면 나는 군사로 그대들을 토벌할 것이다. [[천춘쉬안]], 오정방 등은 남북분열을 우려하여 평화해결을 조언했지만 위안스카이는 무력 토벌의 뜻을 굳힌 후였다. 이어 6월 9일 강서도독 리례쥔이 본직을 망각하고 선동을 하여 혼란을 일으킨다는 이유로 면직시켰고 [[리위안훙]]에게 강서도독을 겸직하게 했다. 위안스카이는 리례쥔에게 거액의 금전을 주며 서둘러 강서성을 떠날 것을 종용했으나 리례쥔은 거부했다. 또한 구양무를 강서호군사로 임명하고 6월 14일 후한민을 광동도독에서 면직시켜 서장선무사로 옮기게 했는데 후한민은 서장선무사 취임을 거부하고 상하이로 떠났다. 6월 30일 위안스카이는 안휘도독 백문울 역시 면직시켜 섬감주변사로 옮겼으나 백문울 역시 취임을 거부하고 난징으로 떠났다. 위안스카이는 신임 안휘도독으로 손다삼을 임명하고 안휘에 주둔한 장군 호만태에게 10만냥을 주어 매수하여 안휘성을 장악했다. 이로써 강경한 국민당 지지파 3인의 도독이 해임되면서 국민당의 무력기반이 와해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