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축전쟁 (문단 편집) === 토원군의 거병 === 사태가 이쯤되자 위안스카이를 무력으로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 일어났다. 선후대차관 사건 다음날인 4월 27일 '정부의 차관이 의원의 결의를 거치지 않고 조인되었음은 입헌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항의전보를 타전하며 격렬히 저항했던 안휘도독 백문울이 제일 먼저 상하이의 천치메이 집을 방문해서 쑨원에게 자신이 거병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쑨원은 위안스카이의 기반에 가까운 안휘성에서 먼저 거병하는 것은 조기진압당할 가능성이 커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만류했다. 이 때문에 쑨원은 백문울을 만류하는 한편 광동의 [[후한민]]과 호남의 [[탄옌카이]]를 거병시키려 했지만 위안스카이가 선수를 쳐서 이들을 모두 해임하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쑨원은 열강의 지지를 얻기 위해 차관 지급 중지를 호소했고 일본을 방문하여 지지를 얻으려 했지만 위안스카이가 측근 [[쑨바오치]]를 일본에 파견하여 일본이 쑨원을 지지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에 상하이에서 쑨원이 회의를 소집하여 다시 토원을 주장했고 [[리례쥔]]이 남방 각성이 호응하면 기의를 일으키겠다고 하였다. 이에 쑨원은 리례쥔을 토원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각성의 호응에 맞추어 위안스카이를 토벌하기로 하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구강요새사령관 진정훈이 리위안훙에게 군대 지원을 요청하였다. 리위안훙은 [[리춘]]을 파견해 1913년 7월 7일 구강 사하진에 병력을 주둔시켰는데 이로 인해 강서의 민심이 동요하자 리례쥔이 그때를 틈타 7월 8일 호구에서 부하들을 규합하여 호구요새를 점령했다. 7월 9일 리례쥔은 강서호군사와 각 기관에 북군을 막기 위해 있는 힘을 다 하겠다고 타전했고 [[7월 12일]] 강서성의 독립을 선포, 토원군을 조직하고 7성 토원연군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계축전쟁이 시작되었다. 또한 강서호군사 구양무를 설득해 강서도독의 명의로 북양정부 이탈을 선포하도록 설득하였다. [[리례쥔]]의 봉기에 호응하여 7월 15일 황싱이 난징에서 강소성의 독립을 선포하고 강소토원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7월 16일 [[천치메이]]가 상하이토원군 총사령관에 취임하여 제조국 본부를 공격했다. 천치메이는 조카 [[천궈푸]]에게 권총으로 무장한 결사대 200명을 지휘하여 상하이 제조국을 점령할 것을 지시했다. 7월 17일 백문울이 안휘성의 독립을 선포하고 토원군을 조직했으며 7월 18일 [[천중밍]]이 광동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7월 18일 유영건의 부대가 상하이의 토원군과 합류하여 상하이 남부 용화 일대를 점령했고 7월 22일 상하이에 대한 총공격을 실시했다. 7월 25일에는 국민당의 압력으로 호남성의 [[탄옌카이]]가 독립을 선포했으며 8월 4일에는 웅극무가 충칭에서 사천성의 독립을 선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