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축전쟁 (문단 편집) == 결과 == 한편 위안스카이는 중의원 오한지와 서수균을 암살하고 국민당 의원 정상겸 등 8인을 체포하는 등 공포정치를 이어나갔다. 국민당의 소요를 진압한 위안스카이에 대한 열강의 지지는 최고조에 달했고 쑨원은 지금까지의 고평가가 터무니없던 폭도로 비난받게 되었다. 위안스카이는 믿을 수 없는 도독과 장군들을 대거 해임하는 한편 강서, 강소, 안휘, 호남에 심복들을 배치하고 호북도독을 겸하던 부총통 리위안훙도 베이징으로 불러들였다. 9월 11일에 진보당 웅희령을 총리로 임명하면서 소위 '일류내각'을 조직하였고 공민단을 동원한 부정선거에서 1913년 10월 10일 위안스카이가 정식 대총통에 선출되었고 위안스카이는 쑨원, 천치메이, 장계, 리례쥔, 백문울 등에 대한 체포령을 하달했다. 이어 국민당을 반역정당으로 몰아 해산하고 1914년에는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1915년, 위안스카이는 아예 [[홍헌제제]]를 통해 황제의 자리를 엿보았으나 이에 반발하는 [[호국전쟁]]을 맞이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때 [[미쓰이그룹]]을 통해 쑨원과 황싱에게 만약 혁명 성공 이후 만주를 일본에 할양한다면 2천만 엔의 군사비와 2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는 군사장비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 들어왔다고 한다. 쑨원과 황싱은 이에 동의했지만 최종적으로 일본 정부가 이 계획을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고 하는데... 이 일화를 소개하는 해롤드 시프린부터가 이 일화가 '검증되지 않은 한 자료'에서 나온 것으로 지적하니까 말 그대로 썰로 보면 되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