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획생육정책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China population BC 400 to 2015.png]] [[중국]]의 역사적 인구. 기원전부터 꾸준히 증가하다 전한, 후한 시기에 6,000만명 선을 유지했고 삼국, 남북국 시대에는 5천만 정도로 감소했다. 이후 [[당나라]] 중후반까지 8,000만명까지 증가하다 오대십국시기까지 다시 5,000만 정도로 감소했다. 이후 [[송나라]]~[[명나라]] 시절까지 1억~ 1억 5,000만명 근처에서 머무르다가 [[청나라]] 시절 평화가 계속되고 농업생산력이 증가하자[* 생산력뿐만 아니라 아메리카에서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등 고산량 농작물 재배도 보급되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이미 [[청나라]] 말기에는 '''4억명'''에 이르렀다. 바로 위에 서술했듯이 중국에서는 평화가 정착되고 농업기술이 발달한 [[명나라]], [[청나라]] 시절 인구가 폭증했다. 20세기 전반에 중국의 혼란 때문에 인구증가 속도는 어느 정도 둔화되었어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이 당시 합계출산율이 4명대 후반~5명대 초반 가량을 기록하였기 대문에 높은 영아사망률과 전쟁, 기근이라는 악재에도 인구증가율 자체는 낮았음에도 인구증가 자체는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1949년 [[마오쩌둥]]이 천안문 망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포할 때 중국의 인구는 5억 4,000만을 기록했다. 계속해서 늘어나던 인구 때문에 북양정부 말기부터 중국 지식인 사회는 [[마거릿 생어]]의 영향을 받아 산아제한을 논하기 시작했으며 국민정부 시대 들어서는 여성의 의무는 가정에서 건강한 아이를 길러내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국가가 과학적으로 우량아의 [[출산]]과 양육을 도와야 한다는 이유로 [[피임]], [[낙태]], 인공유산 등을 정당한 권리로 인정하고 [[무통분만]]을 비롯한 선진적인 [[산부인과]] 기술들을 적극 도입하고 있었다. 남녀가 동등한 사회적 의무를 지니고 있다는 공산주의적 양성평등론에 비하면 [[유교]]보수적인 국민당의 태도에서 기인한 것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태도가 낙태권에 있어선 좀 더 진보적인 태도를 취하게 만든 것. 또 테크노크라트와 유학파의 발언권이 높았으며 이들이 정책 결정과정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국민당 치하에서는 국가의 경제구조가 감당할 수 없는 과중한 인구는 오히려 경제적 부담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실제로 과잉인구로 인한 기아, 폭동 등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인구수를 적정선에서 유지하면서 과학기술을 통한 생산력 증진을 꾀하였다.[* 실제로 장제스는 중국의 위협에 직면한 데다 대만의 인구와 국토가 적어서 대만군 인력충원에 한계가 있었음에도 산아제한 정책을 도입하였다. ~~그리고 저출산 문제도 한국과 똑같이 겪고잇는 중이다.~~ ] 그러다가 1949년 국민당을 뒤엎고 집권한 [[마오쩌둥]]은 이러한 경향에 대해서 정면으로 제동을 걸었다. 마오쩌둥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기에 인력이 갈려나간 경험을 했던 사람이었던 것도 있었기에 '人多力量大' 즉 '사람이 많으면 국력도 크다'고 말하며 다산을 장려하였다. 마오쩌둥은 "소련이나 미국이 핵공격을 해서 6억명 중 3억명이 날아가도 나머지 3억명이 더 많이 낳으면 강해질 것이다"란 발언을 한 다산론자였다. 당연히 생어의 산아제한론은 물론이고 [[멘델의 법칙|멘델의 유전 법칙]]을 비롯해서 계획생육에 관련된 모든 학문은 [[제국주의]] 학문으로 규정되어 금지되었고 낙태, 인공유산, 피임은 모조리 금지되었다. 흔히들 국공내전 이후 사회가 안정되어 먹고 살기 좋아져 인구가 늘어났다고 미화했지만 국가에서 낳아야 할 애 숫자만 안 정해 주는 수준이지 사실상 [[차우셰스쿠의 인구 정책]]마냥 출산 강요를 하던 상황이었고 더욱이 기계적인 [[공산주의]] 양성평등의 원칙에 따라서 여성들이 가사노동과 사회노동을 이중으로 부담해야 하는 중국의 상황상 여성의 부담은 더욱 가중되었다. 임신 8개월, 9개월의 [[만삭]]이라 하더라도 출산휴가는 언감생심이고 오히려 일 못 한다고 두들겨맞는 상황이니 불법 낙태가 판을 쳤고 [[임산부]]들이 중노동을 자처하여 노동으로 낙태하려는 목불인견의 상황이 이어졌다. 결국 공산당원들조차도 여성들을 중심으로 더는 견디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을 치기 시작하니 [[저우언라이]]의 아내 [[덩잉차오]] 등을 필두로 여성 정치인들이 이를 시정해 줄 것을 중앙정부에 요청하였다. 여기에 마인추를 비롯한 학자들도 멜서스를 비판하는 선에서 조심스럽게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산아제한 정책이 실시되었으나 불과 몇 년 후 마오쩌둥이 [[반우파 투쟁]]을 전개하면서 산아제한 정책은 폐기되었고 산아제한을 주장했던 학자들은 "제국주의의 사주를 받아 사회주의 분열책동을 벌인 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한 후 줄줄이 하방당했다. 마인추도 [[베이징대학]] 총장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그 뒤의 [[대약진 운동]]에서 마오쩌둥의 개삽질로 상상을 초월하는 아사자가 발생하자 마오쩌둥도 산아제한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피임 금지를 철회하여 중국의 출산율은 감소세에 접어들었지만 그럼에도 1970년대 초반까지 5명대 이상을 꾸준히 유지했기 때문에 중국의 인구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약 '''10년마다 2억명씩''' 불어나 1970년대 말에는 10억명에 이르렀다. 대약진운동 직후에 보상성 출산으로 1963년 출산율이 7.5명까지 올라간 적도 있었고 이러한 베이비붐은 1970년대 초반까지 이어졌다. 이 당시에는 대약진 운동으로 인구가 감소하였기에 당국에서 산아제한을 시행하려 들지는 않았다. 1960년대 중반에 산아제한에 대한 논의가 나오기 시작했지만 [[문화대혁명]]으로 다시금 논의는 물밑으로 가라 앉았고, 1970년대 초반까지 베이비붐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82년에 인구조사를 할 땐 10억명을 돌파했다. 즉, 30여년만에 인구를 2배 폭증시킨 것이다. 헌데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기간 동안 1950년대에 출생한 1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로 진출하여 노동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하였고 국가에서 늘어나는 노동인구에 맞추어서 막대한 양의 일자리를 만들고 인프라를 건설해야 했기에 이 점에 있어서 과부하가 걸렸고 식량 생산 또한 한계에 다다르는 등[* 다만 이 시기의 식량 문제는 생산성 문제가 컸다. 물론 생산성이 급락한 것이 아니므로 인구증가가 비정상적이였단 게 맞다.] 부작용이 생기기 시작했다. 1950년대 말 대규모 기근으로 약 3,000만명이 아사한 이후 대규모 아사 사태는 없었지만 그래도 중국의 식량사정은 빠듯했다. 경제가 마비된 [[문화대혁명]] 시기에도 식량 증산을 위해서 대규모 개척 사업이나 간척 사업이 끊임없이 진행되었다. 이 때문에 [[윈난성]] 여러 밀림이나 [[내몽골]]의 여러 초원들도 농경지로 개척되었다. 이런 개척의 후유증으로 그곳이 아예 사막으로 변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둥팅호나 쿤밍의 톈츠처럼 호수를 낀 여러 명승지가 간척사업 때문에 상당히 파괴되었을 정도. 그러나 인구는 1970년대 초반까지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그로 인해 늘어나는 인구를 감당하지 못해 식량배급이 1970년대 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니까 매 가구에 지급되는 양표(粮票)라는 식량쿠폰이 없으면 돈을 아무리 줘도 배급소에서 식량을 살 수 없었다.[* 이 양표는 각 성이나 지방마다 모양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는 수집가들의 아이템이 되고 있다.] 또한 중 국같은 큰 나라는 식량이 안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식량자급은 꼭 필요하다. 아울러 중국은 한국 못지 않게 인구 분포가 불균형하고 서부 지역이나 내몽골 같은 데는 사람이 살기가 어려운 환경이므로 평야나 해안 지역에 인구가 주로 몰리는 문제가 있다. 또한 개발도상국에 지나치게 높은 인구증가는 경제 발전에 좋지 않다고 여겨진다. 자녀 양육 비용이 늘어나고 그로 인해 가계당 잉여자금이 줄어들어 저축이 늘어나지 않는다. 개발도상국에서 국내 투자자금을 조성하는 데 필수적인 저축이 정체 상태라는 것은 치명적인 문제다. 게다가 그 자녀 양육비용이 효율적으로 쓰이는 것도 아니다. 자녀 둘이면 둘 모두 대학 보낼 수 있는 것이, 자녀 다섯이면 하나 대학 보내기도 벅차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대혁명]]의 여파가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1970년대 초반부터 [[저우언라이]]가 산아제한을 건의했고 이를 마오쩌둥까지 동의하면서 농어촌지역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산아제한 운동을 펴기 시작했으며[* 다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지방정부에서 실적 거두기용으로 무리수를 두는 경우도 많았다. 사실 강제 낙태나 영아살해 같은 악습도 1자녀 정책 실행 때보다 덜할지라도 사실상 이때부터 시작된것 이었고 이는 201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 그 결과 출산율은 빠르게 떨어지기 시작하여 1970년 5.65명이던 출산율이 1972년을 기점으로 5명 아래로 떨어진 것을 시작으로 1973년에는 4.57명, 1974년 4.18명, 1975년 3.81명, 1976년 3.47명, 1977년 3.18명, 1978년에는 2.94명, 1979년에 2.75명 순으로 매년 큰 폭으로 떨어졌고 출생아 수도 1970년대 초반에는 3,000만명에 육박하던 수준에서 2,000만명 아래로 떨어지며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다.[* 1979년 당시 한국의 출산율은 2.90명으로 오히려 중국보다 높았으며 1980년에도 중국보다 높은 출산율을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에서 농촌 인구가 많아 1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구 수가 생각보다 적은 데다 아들을 무리해서 낳으려는 사람이 많아 출산율 하락폭이 낮아서 이후 쭈욱 중국이 한국보다 출산율이 높게 집계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출산율 감소에도 1963년~1971년도에 출생한 2차 베이비붐 세대들이 막 아기를 낳으려는 시기가 다가왔고, 출생아 수의 감소가 어려워질 것을 염려한 집권한 새 지도부는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안보적 문제도 고려하여 1980년부터 아예 [[한족]]들에게 1자녀만 낳을 것을 강제하며 강압적으로 정책을 시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산아제한 정책 시행에 대해서 이미 출산율이 충분히 감소되었는데 뭘 더하라는 반발이 농어촌 지역을 중심으로 나오고[* 그래서인지 1980년대 당시 중국의 출산율은 강압적인 산아제한에도 불구하고 [[몽골]]과 [[북한]]을 제외한 나머지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높았다.] 서방국가로부터도 인권침해라는 문제제기도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이러한 논의에 대해서 식량 문제와 난민 발생 발언 등으로 묻어 버렸다. 그래도 무조건 1자녀는 농촌지역에서 호응을 얻기 힘들다는 목소리가 당내에서도 나왔고 결국 시골 지역에서는 특정 조건만 충족시키면 2자녀, 경우에 따라서 4자녀까지 낳을 수 있도록 했는데, 그래서 도시 지역에서 출산율이 1명대를 기록할 동안 농어촌 지역은 2010년대 중반까지도 2명대를 유지해서 농어촌 지역일수록 다산가정이 많은 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