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계획생육정책 (문단 편집) == 꼭 1자녀여야 하는가? == 영미권에서는 One Child Policy라고 번역하므로 일반적으로 반드시 아이를 하나만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출산율]]이 1.0보다 높을 수가 있을까? 이는 제도가 적용되었을 당시에 도시에서는 1자녀만을 낳도록 했지만 농어촌에서는 첫째가 딸이면 둘째까지 가질수 있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당시에는 남아를 선호하는 관념이 위낙에 강하다보니 아들을 낳을때까지 벌금을 감수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산아제한 정책이 시행되었을때에도 출산율이 일정수준 이상 유지했던 이유였다. 역설적으로 중국의 출산율이 산아제한을 철폐 및 출산장려로 전환했음에도 출산율이 1명대 초반대로 급감하게 된것도 이러한 관념이 쇠퇴해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수민족]]에 대한 일종의 보호책으로 보통 2자녀 이상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중국 정부]] 공인 55개 소수민족 중에는 인구수가 수천 명에 불과한 민족도 여럿 있기 때문에 이들에게 1자녀만을 갖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의 절멸책에 가깝다. 중국은 공산당이 정권을 잡을 때부터 소수민족의 존재를 아예 인정하지 않은 국민당과는 달리 소수민족 보호를 약속했기 때문에, 소수민족 보호를 위해 도시에 살고 있을 경우는 2명, 농촌지역은 3~4명까지도 허용되었다. 이렇기 때문에 [[위구르]]족은 2010년대 전반기까지 인구수가 크게 늘어났었다.[* 다만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이 워낙 경제가 발전되지 못한 지역이다 보니 이렇게 인구압력이 팽창하자 그 불만이 [[이슬람 근본주의]]나 독립열기로 확산되고 있다.] 반면 [[만주족]]의 경우 [[청나라]] 때 한족들을 [[변발]]령, [[문자의 옥]] 등으로 탄압했고 그 보복으로 [[태평천국 운동]] 및 [[신해혁명]]으로 자신들이 한족들에게 대거 학살당했던 것 때문에 대부분 자신들이 만주족이라는 사실을 대놓고 드러내지 않으면서 한족인 척 연기하며 살았으므로 자신들이 자녀를 2명까지 가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족으로 위장하기 쉽게 일부러 1자녀만 가진 경우가 많았다. 벌금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부유한 사람도 많이 낳을수있었다.[* 돈은 있는데 법망을 피해서 낳고 싶은 사람들은 [[미국]]이나 [[홍콩]], [[마카오]]로 [[원정출산]] 가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유명한 중국 영화감독인 [[장예모]]는 2013년에 아이를 몰래 7명을 낳은 게 밝혀져서 748만 위안(약 12억원)에 가까운 벌금을 냈다. 더군다나 한자녀 정책이 전국적으로 동일하게 적용된 것이 아니고 지역별로 몇 명까지 낳을 수 있을지 정책이 달랐기 때문에 1자녀 정책을 적용받는 가구의 수는 총가구의 40%에 못 미쳤다. 게다가 [[쌍둥이]]의 경우는 의도적으로 둘째나 그 이상을 만든 게 아니므로 불이익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그래서 중국 여성들이 부작용을 감수하고 '쌍둥이 낳는 약'을 구해서 먹는 사례도 있었다. 또 2000년대에는 둘째 만든다고 해서 낙태시키거나 감옥에 넣는 것도 아니고 벌금을 내거나 이런저런 불이익이 주어졌는데 문제는 이게 재산비례 벌금이 아니라 누구나 같은 액수의 벌금이기 때문에 서민층에는 이러한 불이익이 치명적이지만 상류층은 그깟 벌금 내고 말지 뭐 하고 둘째를 낳는 경우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무원, [[교원]]들은 둘째를 낳으면 벌금은 물론이고 직장을 잃을 각오도 해야 하기에 위장이혼을 하는 경우도 2000년대에는 빈번했다. 정부 몰래 낳으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가 있는데, 중국의 사회통제 정책은 그렇게 허술하지 않다. 이렇게 호적에 올리지 않고 몰래 [[임신]]하여 아이를 낳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서 일단 1자녀를 가진 여성은 무조건 정기적으로 보건소에 출두하여 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운 좋게 신체검사를 통과하여 아이를 낳았다고 한들 호적에 올리지 않은 아이는 절대로 학교에 입학할 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성장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1자녀 정책을 위반하고 출생하여 호적에 오르지 못한 인구는 문명화가 거의 안 된 농촌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 호적에 오르지 않은 아이의 수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3&aid=0006922177|1,300만 명(추정치) 정도에 불과(?)하다]]. 중앙에서 책상머리로 입안된 [[대약진 운동]]이 겨우 1년만에 중국 전역에서 철저히 실시되었다가 커다란 문제를 야기할 정도로 중국의 사회통제는 강력하다. 중국 입양법(中华人民共和国收养法)은 [[양자(가족)|양자]]도 1명만 들일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收养人只能收养一名子女."(제8조)] 이 또한 이 정책의 일환으로 알려져 있다. 이는 친자를 양자로 위장해서 우회출산하려는 꼼수를 방지하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다산을 선호한 농업국가였던 중국에서 전통을 갑자기 180도 바꾸는 데는 어려움도 많았다. 1990년대의 중국 신문을 보면 이 계획생육정책이 실시된 지 10년이 넘었지, 농촌 지역에서 이에 대한 반발이 극심했다. 지역별로 보자면 베이징과 상하이를 비롯한 주요 대도시나 동북 3성 일대의 출산율은 이미 1980년대에 1명대 중반 수준으로 재빨리 떨어트렸지만[* 그리고 2010년대 이후로 해당지역들의 노인인구가 중국 전국에서 가장 높은 결과를 낳았다.] 소수민족 자치구역이나 농촌지방은 합계출산율이 인구대체선을 훌쩍 뛰어넘는 경우가 대다수였고 강력한 산아제한에도 중국의 출산율이 동시기 한국이나 대만에 비교해서 높았던 이유도 농어촌 지역의 출산율이 대도시 지역에서 떨어지는 출산율을 보충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나온 [[인민일보]]나 중국청년보의 기사를 보면 초생촌(超生村), 즉 계획생육정책이 잘 지켜지지 않는 마을이 어떻게 가난하게 허덕이고 있는지, 다산 가구들이 어떻게 비참하게 사는지에 대한 르포기사가 자주 실렸다. 이는 계도성 보도로, 사람들에게 다산의 폐해를 인식시키기 위한 것. 중국 정부가 1970년대 말부터 이런 강제정책을 밀어붙였지만 농촌 지역에서는 무시되는 경우가 많았으며 마을 사정에 따라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시에서는 비교적 잘 지켜진 반면 농촌에서는 자녀가 노동력이자 노후보장이라는 2가지 이익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중앙에서 한두명만 낳으라고 명령을 해도 편법으로 3명 이상. 심지어 1985년에는 쓰촨성에서 쩡잉룽(曾应龙)이라는 사람이 이 정책에 반발해서 폭동을 일으켜 병원을 점거한 뒤에 스스로 '''대유국 황제'''라고 칭제하다가 인민해방군에게 진압당한 사태도 있었다고... 그래서 이 시대에도 다산가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아이돌 가수인 [[화전소녀]]의 [[푸징]](1995년생)이 4남매 중 둘째, [[중국 여자 배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 [[주팅]](1994년생)이 6남매 중 맏이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