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구려/왕조 (문단 편집) == 개요 ==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는 705년의 역사와 28명의 군주를 가진 나라였다. 평균 재위 기간은 25년으로 한국사 역대 왕조 중 가장 긴 편이었다. 참고로 이로부터 700여 년 뒤의 왕조인 조선 군주의 평균 재위 기간이 19년 2개월인 걸 생각해보면 매우 놀라운 재위 기간이다. 다만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3대의 계보가 상당히 비현실적인 것을 보았을 때 이 사이에 누락된 군주가 더 있었거나 신라나 백제의 초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건국 및 초기 연대에 약간의 왜곡이 가해졌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그렇다면 평균 재위 기간은 조금 깎일 여지가 있다. 아무튼 후대의 [[고려]]와 [[조선]]보다 훨씬 오래 존속했으면서도 군주의 수가 고려보다 적고 조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군주들의 평균 수명이 비교적 길었거나 왕권의 안정성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대다수의 고구려 군주들의 시호가 완전하게 전하지 않으며, [[광개토태왕]]의 경우를 보건대 완전한 시호는 꽤 길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의 군주들도 마찬가지이다. [[태조(고려)|고려 태조]]의 시호는 '''응운원명광렬대정예덕장효위목인용신성대왕'''('''應運元明光烈大定睿德章孝威穆仁勇神聖大王''')인데 후대로 내려갈수록 후대 군주들이 두 글자씩 덧붙인 것이다. 이 긴 시호를 줄인 것이 신성왕(神聖王) / 신성대왕이다. 아니면 묘호만 써서 태조라고 부르거나 군주가 묻힌 능의 이름을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광개토태왕의 경우에는 그나마 광개토태왕릉비가 남아 있어서 완전한 시호가 오늘날까지 전해질 수 있었다. 고구려에서는 흔히 태왕이 묻힌 곳(장지명)으로 태왕을 호칭했다. 특히 그 가운데 광개토태왕이 묻힌 '국강상'은 당시 수도이던 국내성 인근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서에 나타나는 [[고국원왕]]의 '고국원', [[고국양왕]]의 '고국양'과 같은 곳으로 보인다. 고국원왕의 또 다른 호칭이 바로 '국강상왕'인 것이다. 다시 말해 고구려가 국내성에 도읍하던 당시에는 국내성 인근을 가리켜 '국강(國崗)'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지만, 평양으로 도읍이 이전한 뒤에는 옛 수도라는 의미에서 '고국원(故國原)'이라는 표현이 사용된 것이다.[* 羅神, <有關高句麗王號制度的幾點推測(고구려 왕호 제도에 관한 몇 가지 견해)>,《고구려 광개토왕과 동아시아》, 한국 고대사 학회, 2012년 참조.] 군주가 묻힌 곳으로 군주를 호칭하는 방식은 훗날 [[고려]]나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는데, 대표적으로 [[세종(조선)|세종]]을 능의 이름을 따서 영릉(英陵)이라고 부른 것이 있다.[* 예를 들어 훗날 세종 시절의 일을 이야기하려거든, "영묘조(英墓祖)때 있었던 일인데…" 하는 식.][* 다만 이는 세종의 묘호가 [[세조(조선)|아들의 묘호]]와 시자(諡字)가 '세(世)'로 겹쳐,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폭넓게 사용된 면이 크다. 보통 -묘조(-廟祖)로 지칭하는건 묘호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선조(조선)|선조]]→선묘)] 삼국시대가 정복 국가 시대이고 특히 고구려가 그러한 성향이 두드러진 만큼 정복 군주가 상당히 많았는데, 고구려의 대표적인 정복 군주로 [[동명성왕]], [[대무신왕]], [[태조대왕]], [[미천왕]], [[광개토태왕]], [[장수왕]] 등이 있다. 이 중 한국 역사에서 꼽히는 대표적인 정복 군주가 바로 [[광개토태왕]].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고, 남한 학계의 대다수는 이 설을 따르고 있다. 북한과 남한 소수 학설에서는 일부 고구려 일부 역사가 삭제되었다고 주장하며, 고구려 건국 연도를 기원전 300년 근처로 보고 있다. [[당나라]]의 한 장수가 언급한 고구려 900년설을 따른 것. 실제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년인 기원전 37년 이전부터 옛조선의 땅에 고구려라는 집단이 존재했다는 중국측 사료는 많이 있다. 그래서 기존에 토착세력인 고구려 집단 혹은 초기왕국을 부여에서 이주한 추모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왕위를 쟁취한 시점이 기원전 37년이며 이때를 고구려 건국년으로 보는것이다. 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삼국사기》의 기원전 37년설을 따르기도 하고, 위키백과 등에서 그렇게 서술되지만 《삼국사기》 초기 기사의 신뢰성 문제로 실제 고구려의 건국 연대를 [[태조대왕]] 대로 보는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이는 백제 건국을 생각하면 지나친 고구려 역사 축소다.[* 현행 한국 국사 교과서는 [[대무신왕]]의 이름까지도 등장하기는 한다.] 대부분의 고대 국가들이 그랬듯이, 왕위를 계승하는 형태에서 많은 변동이 일어났다. [[대무신왕]] 때부터 [[산상왕]] 때까지는 형제간에 왕위를 계승하는 경우가 자주 일어났지만, 산상왕 때부터 점차 왕권이 강화되고 국가의 기틀이 안정됨에 따라 특별한 일이 없다면 대개 고구려의 왕위는 부자간에 계승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왕위 계승 형태가 변동되는 과정에서 군주의 형제들이 왕위를 노리고 모반을 일으키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여담으로 현재 고구려 고씨 왕실의 후손들이 바로 '''[[횡성 고씨]]'''로 전국에 약 6,000여 명 정도 살고 있다. 고구려의 초대 군주였던 추모성왕을 시조로 삼고 있으며, 중시조는 고구려의 마지막 군주인 [[보장왕]]의 아들 고인승인데 바로 고구려 부흥운동 때 잠깐 군주로 추대됐었던 고안승의 형이다. 고인승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8년 고구려가 멸망하자 기타 왕족들처럼 당나라로 끌려가지 않고 강원도 횡성으로 도망쳤으며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다. 족보로만 따진다면 초대 군주 고주몽의 21대손이자 고구려 군주들 중 가장 유명한 광개토대왕의 9대손이 된다. 광개토왕릉비의 기록을 따르면, 고인승은 추모의 26대손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