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담(북제) (문단 편집) === 사치향락에 빠지다 === 562년, [[장남]] [[고위]](高緯)를 황태자로 삼았다. 관료들인 고원해(高元海), 필의운(畢義雲), 고건화(高乾和) 등이 동의해서 고귀언(高歸彥)을 기주(冀州)자사로 임명하고 중앙에서 내쫓았다. 고귀언이 기주에 도착했을 때 여사예(呂思禮)가 반란 계획을 보고했다. 무성제 고담은 장수 단소(段韶), 누예(婁叡)를 보내 고귀언을 체포하고 아들 및 손자들과 함께 처형했다. 여름, 어머니인 태황태후 누씨가 죽었는데 무성제는 상복을 입지도 않았을 뿐더러 상중에 계속해서 연회를 열고 음악을 연주했다. 이때 화사개(和士開)가 황제를 말렸지만 빡친 무성제는 화사개의 뺨을 때렸다. 고담이 황제가 되자 형 문선제 고양의 황후였던 이씨(이조아)와 강제로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는 형수인 이씨에게 자기의 요구를 응하지 않으면 아들 고소종(高紹德)을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결국 임신시켰다. 이씨는 부끄러움에 아들 고소종과 만나기를 거부했는데 고소종은 어머니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화가 났다. 그 후 이씨는 딸을 낳았는데 던져 죽였다. 이를 알게 된 무성제는 화가 났다. > '''"네 년이 내 딸을 죽였으니 나는 네 아들을 죽이겠다!"''' 직후 조카인 고소종을 불러 이씨가 보는 앞에서 폭행하고 활을 쏴 죽여버렸다. 이씨가 슬피 울자 화가 난 무성제 고담은 그녀를 내던지고 때렸다. 이씨는 심한 부상을 입었지만 곧 회복되었고, 무성제는 그녀를 황궁에서 내쫓아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도록 했다. 563년, 무성제는 화사개를 아주 신뢰했고, 계속해서 궁에 머무르게 했다. 무성제는 화사개가 집으로 가면 곧장 다시 소환했고 이로 인해 화사개는 큰 보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 둘 사이는 황제와 신하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졌으며 화사개는 [[무성황후 호씨]]와 바람을 피우기도 했다. 화사개는 무성제에게 들어가서 즐기고, 골치아픈 조정은 관료들에게 맡기라고 했으며 무성제는 그렇게 했다. 내정은 조언심(趙彥深), 재정은 고문요(高文遙), 군사부문은 당요(唐邕)에게 맡겼으며 황태자 고위의 교육은 황후 호씨의 형부인 풍자종(馮子琮), 황후의 사촌인 호장찬(胡長璨)에게 맡겼다. 정사는 모두 신하들에게 맡긴 채 3~4일에 한 번씩 조정에 나와 간단한 회의에만 참석했다. 이때 무성제 고담의 큰형 [[고징]]의 아들 고효유(高孝瑜)가 화사개와 황후 호씨간의 관계를 조사했는데 위기에 처한 화사개와 무성제의 사촌 고예(高叡)는 이에 대응하기로 했다. 화사개와 고예는 거짓으로 고효유에게 반역 혐의를 씌웠고, 무성제는 고효유를 독살했다. 564년, [[북주]]가 군대를 두 개로 나눠 북제를 침략했다. 남군은 달해무(達奚武)가 사령관을 맡고 평양(平陽)으로 쳐들어왔으며, 북군은 [[양충]](楊忠, [[문제(수)|수문제]] 양견의 아버지)이 [[돌궐]](쾨튀르크)과 동맹을 맺고 북방을 공격했다. 이에 곡률광(斛律光)을 남쪽으로 보냈고, 무성제 본인은 직접 제2의 수도인 진양으로 가서 북주군을 막았다. 하지만 무성제가 진양에 도착했을 때 북주와 [[돌궐]] 연합군이 급습해왔다. 무성제는 도망갈까 생각했지만 고예(高叡)와 고효완(高孝琬)의 반대로 도망가지는 않았다. 단소는 양충의 공격을 막아냈고, 양충은 철수했으나, 그러는 동안 진양 북쪽 영지는 돌궐족들에게 약탈당했다. 봄, 북제의 형법을 만들었는데 무성제는 법을 널리 알리는 것에도 흥미가 있었기 때문에 관료들의 아이들에게 법을 공부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이전 시대보다 법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도가 올라갔다. 그리고 징세 제도도 개혁하여 세금 부담을 줄여주는 한편, 땅이 없는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주어 농사를 짓게 했다. 이로써 전반적인 생산력도 늘어났다. 하루는 점쟁이가 와서 무성제에게 병이 생길 운이라고 말하자 무성제는 이 운을 자기의 조카이자 형 효소제 [[고연]]의 아들 고백년에게 돌리려고 했다. 고백년의 선생은 가덕주(賈德冑)였는데 이때 고백년은 서예를 배우고 있었다. 고백년은 연습삼아 하필 '칙'(敕)(황제의 조서, 칙서라는 뜻)을 몇 자 베껴 썼다. 무슨 생각인지 가덕주는 고백년이 쓴 칙을 무성제 고담에게 보냈는데 무성제는 조카인 고백년을 불러 '칙'을 써보라고 했다. 그리고 가덕주가 보낸 '칙'과 비교해 보니 과연 필체가 일치하는 것을 확인하고, 호위병을 시켜 감히 황제 자리를 노린다며 고백년을 때렸고 심한 부상을 입힌 상태에서 그대로 참수해버렸다. 565년, 북주의 [[섭정]] [[우문호]](宇文護)가 윤공정(尹公正)을 북제에 평화 사절로 보내, 평화에 대한 보답으로 우문호의 어머니 원씨와 그의 고모 우문씨(우문호의 삼촌, [[우문태]]의 여동생)를 북주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다. 하지만 무성제는 북주와 [[돌궐]]이 공격해올까 두려워서 우문씨만 북주로 돌려보냈다. 가을, 무성제는 데리고 있었던 원씨를 이용해 우문호의 약속이 담긴 편지를 받기를 원했다. 단소(段韶)가 반대하긴 했지만 무성제는 우문호를 두려워해 원씨도 돌려보냈다. 겨울, 돌궐이 북제의 북방을 침략했는데 우문호는 자기가 혹시나 그들을 속였다고 생각할까 두려워 북제를 공격해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단소와 [[고장공]](高長恭)이 낙양에서 북주의 군대를 물리쳤고 북주군은 철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