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문단 편집) == 개요 == '''고려'''{{{-2 (高麗)}}}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약 474년간 [[한반도]]에 위치했던 [[불교]]왕국이다. 918년 [[왕건]]이 주군이었던 [[태봉]]의 [[궁예]]를 [[역성혁명]]으로 몰아내면서 태봉을 멸망시키고 [[고려]]를 건국했다. [[고려]], [[후백제]], [[신라]]로 나뉘어 대치하던 [[후삼국시대]]를 [[태조(고려)|왕건]]이 936년에 통일했고, 이후 약 456년 동안 [[고려/왕사|총 34명의 군주]]가 계승했는데 918~936년의 18년은 엄밀히 고려시대가 아닌 후삼국시대다. 그러므로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부터 고려가 멸망한 1392년의 역사니까 당연히 456년이다. 1392년에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기 전까지 [[함경북도]]의 상당수 지역들을 제외한 한반도 대부분의 지역들을 지배했다.[* 함경북도 지역들은 [[세종대왕]]의 [[4군 6진]] 개척으로 조선의 영토로 확실히 편입되기 이전에는 특정 국가들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던 야인들의 영역이었다.] 고려 전기 [[발해]]를 멸망시킨 [[요나라]]([[거란|거란족]])와 [[북송]]의 세력 균형 체제라는 국제적인 정세 속에서 고려는 요나라의 [[여요전쟁|3차에 걸친 대규모 침략]]을 [[귀주 대첩|막아내며]] 훗날 요송과 더불어 균형적인 삼강 체제를 이룰만큼 강한 국력과 위세를 가진 120여년간의 황금기를 보내게 된다. 그러다 중기에 들어서며 내부적으론 [[문벌귀족]]이 들어서고 외부적으론 요와 북송을 차례로 쓰러트린 [[금나라]]([[여진족]])가 고려에 칭신을 요구하자 책봉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이전에 고려가 여진족들에게 [[조공]]받던 시절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이후 [[몽골 제국]]과 30년간의 기나긴 전쟁 끝에 결국 입조하여 [[원 간섭기|원의 제후국]]이 된다. 다만 [[금나라|금]]과 [[남송]]을 포함한 유라시아의 여러 국가들이 [[몽골 제국]]에 멸망당하는 동안, 고려는 비록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조정은 강화도에서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지방 정규군과 백성들의 끈질긴 저항을 하게 된다. 몽골군 초기 침입군의 총사령관은 한국인들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살리타이]]인데, 이 사람은 [[무칼리]]가 이끌던 잘라이르부 출신으로 이 부족은 당시 최강대국이자 몽골족 최대의 원수 [[금나라]]와 여러 차례 정면으로 충돌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스님인 [[김윤후]]에게 죽었다고 무시당하는 경향이 있지만 살리타이 본인도 금나라와의 전면전에 참전한 역전의 용사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그리 무능한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초에 철저한 능력주의 사회였던 초기 몽골에서 능력이 없었으면 그 정도 지위까지 가지도 못했을 테고. 이후에는 원정 병력의 정예도가 좀 떨어졌을 가능성이 있지만, [[쿠빌라이 칸]]이 고려에 "아직 몽골에 항복하지 않은 나라는 남송과 너희 나라(고려)뿐이다."라고 한 적도 있다는 걸 보면 전쟁 후반부에도 몽골 수뇌부는 베트남의 [[쩐흥다오]]를 포함하여 고려가 끈질기게 저항하는 세력으로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 쿠빌라이 칸은 남송정복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전과 기록을 보면 저항이었는지 아니면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무신정권의 방치 속에서 일어난 일방적인 초토화였는지 논란이 많다.]] 쿠빌라이의 해당 발언 또한 당시 쿠빌라이는 아직 황제 자리에 오르기도 전이었고, 대칸의 자리를 두고 아릭 부케와 계승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의 몽골 귀족들은 아릭 부케를 후계자로 밀고 있었다. 몽골인들은 막내에게 자기 재산을 물려주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아릭 부케는 몽골 본토를 다스릴 수 있었고, 전임자였던 뭉케 칸은 공공연히 자기 후계자로 아릭 부케를 찍어두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쿠빌라이는 비몽골족 출신의 지지를 얻기 위해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그가 한화정책을 추진한 이면엔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연히 길에서 만난 외국의 사신이, 그것도 외국의 태자가 자신에게 예를 갖춰 인사를 올린 것은 곧 자신의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쿠빌라이로서는 기뻐하는게 당연했다. 한마디로, 쿠빌라이의 저 말은 고려를 특별히 높이 평가하거나 우대해서 나온 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정통성을 인정해주는 고려 태자에 대한 기특함에서 나온 거창한 '미사여구'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당시 고려는 적절한 외교술을 벌인 것으로 평가받는데 '역사저널 그날 - 쿠빌라이와 원종의 만남, 고려의 운명을 바꾸다.' 편이 그러하다. '''하지만''' 여몽전쟁 당시 고려가 정말로 제대로된 외교를 했는지에 대해서는 비판하는 의견 또한 많다. [[임용한]] 교수 또한 자신의 저서에서 이 당시 고려 조정의 행태를 강하게 비판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몽전쟁/평가]]와 [[여몽전쟁/무신정권 비판]] 문서를 참조. 결과적으로 고려가 비록 큰 피해는 입었지만 나라의 멸망은 피하였고, 이후 [[원 간섭기|몽골제국에 신속]]하여 [[속국]]·[[속령]]이 되었다. 원 간섭기 [[고려]]와 몽골의 [[종속 지역|종속 관계]]를 두고, [[독립국]]으로 유지되는 한편 몽골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이중적인 현상 때문에 당시 고려의 위상에 대해 다양한 견해가 제기되었다. 대표적으로, 여몽관계를 전통적 [[한중관계]]의 연장선상에서 파악하는 '조공책봉관계론'이 있으며, 김호동과 모리히라 마사히코는 [[몽골제국]]의 구조 속에서 위치를 파악하여 각각 대몽골 울루스의 외연적 속국·카안 울루스의 내포적 속령으로 규정하거나 '투하령(고려왕부)'으로서 재래왕조체제가 유지되긴 했으나 그 강역 자체를 고려국왕이 배타적으로 점유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다만 모리히라 마사히코의 견해는 학계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많다. 한편 샤오지칭(蕭啓慶)은 당대 고려의 지위가 근대 식민제도 중 간접통치하에 놓인 [[보호국]]에 준한다고 해석하기도 했다.(蕭啓慶(1983),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与强權政治>, 《元代史新探》.) 이후 고려 후기 [[원나라|원]]이 쇠퇴하자 [[공민왕]]이 [[병신정변|반원정책]]을 펼치면서 기존의 몽골-고려의 종속적인 지배 구조를 재편했다. 당시 몽골인들은 옛 송나라 영토나 서쪽 중앙아시아 사마르칸트 등으로 이주의 눈을 돌렸기 때문에, 위구르계 장씨 정도 등을 빼면 생각보다 고려에 귀화한 몽골인은 수가 많이 적었다. 공민왕 이후 제대로 된 독립국으로 회귀한 뒤에도 [[공민왕]]의 개혁 실패와 시해, 권신 [[이인임]]의 전횡, [[홍건적]]과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의 대규모 침공]] 등으로 내우외환이 이어지다가 [[제2차 요동정벌]] 당시 원정군 사령관으로 보냈던 장수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원정군 병력으로 개경을 함락하고 [[최영]]과 [[우왕]]을 몰아내면서 사실상 실세의 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왕실이 유명무실한 상태로 전락했으며, 1392년에 이성계 본인이 국왕에 등극하면서 [[개성 왕씨|왕씨 왕조]]는 멸망을 맞이했고 고려로 남아있었던 국호도 1393년에 조선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호인 고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이념을 실천하여 초기부터 [[거란]]에게 강경책을 구사하는등 자주적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존속기간 내내 국체를 보존하기 위해서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라는 사실이 무색하지 않게 [[요나라]]와의 [[여요전쟁|총력전]]을 마다하지 않고 고구려의 옛 판도를 회복하고자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 정벌]], [[요동 정벌]] 등을 과감히 단행하였다. 하지만 애초에 무신들을 차별대우하며 문신들을 우대하던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무신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반란도 많이 일어났고, 국가 역시 [[무신정변]] 이후로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참고로 고려는 초기 때부터 문신들을 우대하고 반대로 무신들을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현종(고려)|현종]] 시절 일어났던 '''[[김훈·최질의 난]]'''이었다. 거란의 제3차 침입을 대비하던 도중에 일어났던 이 반란은 정말 상식 밖의 상황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제2차 거란의 침입 이후 국토가 황폐해지고, 거란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키우는 과정 중, 국가에서 관료들에게 지급해야할 전시과에도 문제가 생겼다. 그런데 '''문제는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통해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때문에 거란의 2차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졸지에 빅엿을 먹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손가락을 빨게 만들어버렸다. 특히나 주요 인물인 최질과 김훈은 2차 침임 때 공을 세워서 최고 관직인 상장군까지 올라간 최상급 무신들이었다. 이게 현종 재위 초기인 3년차 1012년으로 그러니까 반란 2년 전이었다. 이때 요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탈환하겠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한 뒤였으며 이 해에 이미 거란과 산발적으로 싸움을 벌이던 중이었다. 흔히 여요전쟁에 대해서 1차는 993년, 2차는 1010년 ~ 1011년, 3차는 1018년 ~ 1019년으로 묘사되지만 실상을 보면 1011년에서 1017년까지도 거란은 지속적으로 고려의 강동 6주를 공격하고 있었다. 고려는 피해를 입긴 했지만 거란도 강동 6주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고려의 땅을 빼앗지 못했다. '''그러니 이런 조치는 군대의 사기를 떨어뜨리기 딱 좋은 어리석은 짓이었다.''' 결국 월급이 안나와서 뿔난 최질과 김훈이 주도하는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이들은 현종에게 위협이 담긴 호소로 월급을 빼앗아간 문신들을 귀양보내고 [[무신정권]]을 세웠다. 또한 무신들은 영업전의 반환은 물론 6품 이상의 모든 무관들에게 문관직을 겸하도록 요구했으며 현종은 이를 모두 들어줬다. 그러나 몇 달 안가 현종이 [[왕가도|이자림]][* 이때 계책을 세운 공으로 왕씨를 사성받아 [[왕가도]]로 개명했다. [[덕종(고려)|덕종]]의 2비 경목현비와 [[문종(고려)|문종]] 때 일어난 쿠데타 모의 사건 때 처벌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인 왕무숭의 아버지였다.]의 계책으로 무신들을 [[서경(고려)|서경]] [[장락궁]]에 초청해서 연회를 베푼 사이 '''술에 취한 장군들 19명을 모조리 죽이고'''(...), 나머지는 항복하면서 의외로 싱겁게 끝나게 된다. 이는 한 고조 유방이 이성 제후왕들을 숙청할 때, 초왕 [[한신]]을 사로잡은 운몽 연회의 고사를 차용한 것이었다. 사실상 고려 최초의 [[무신정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허무한 결말 때문인지 이상하게 비중이 적은 사건이다. 고려시대는 종교적으로는 [[통일신라]]의 대를 이어서 불교 문화가 크게 발달했다. 한반도의 전통문화와 현대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치관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은 적다고 사료되지만. 한국 불교의 많은 의례들이 사실상 고려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현재 대한민국에 [[불교]] 신자들의 수가 전체 인구중에 20%가 넘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영향력이 적다고도 할 수 없겠다. 또한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유교 즉, 성리학 또한 [[안향]]에 의해 고려 중기 때 도입된 사상이니 이 또한 고려의 영향력이 후세에 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라고 볼 수 있다. 고려라는 이름은 대기업이나 유명 브랜드로는 고려인삼, 고려은단, 고려아연이나 자영업으로는 전국의 그 수많은 고려 삼계탕을 비롯해서 대한민국에서 명실상부 [[조선]], [[신라]]와 함께 기업체나 가게 이름으로 가장 많이 쓰이는 국명이다. [[고려대학교]], 북한의 [[고려항공]]과 [[고려호텔]] 역시 유명하다. 이것은 고려가 대한민국 국민들의 정체성에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다는 증거라고도 볼 수 있다. 일명 '[[고려청자]]'라고 불리는 고려 시대 상감청자는 지금도 제작하는 도공들이 있으며 대한민국의 대표 공예 장식품 중 하나로서 대접받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