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문단 편집) == 경제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yuniljung.com/0091000301200501240125_16_4.jpg|width=100%]]}}}|| || {{{#000,#fff 고려의 대외무역도.}}} || >숙종(肅宗) 7년(1102) 9월 제서(制書)를 내리기를, >“[[사농공상|사민]](四民)이 각각 그 생업에 오로지 종사하게 되면 진실로 나라의 근본이 되는데, 지금 듣건대 서경(西京)의 습속이 상업(商業)에 종사하지 않아서 민(民)이 그 이익을 잃고 있다 하니, 유수관(留守官)은 그 아뢴 대로 화천별감(貨泉別監) 2명을 차정(差定)하여 날마다 시장의 가게[市肆]를 감독하게 하여 상인들로 하여금 모두 힘써 무역의 이익을 얻게 하라.” >라고 하였다. >---- >[[https://db.history.go.kr/KOREA/search/searchResult.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itemIds=&indexSearch=N&codeIds=PERIOD-0-3&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C%83%81%EC%97%85&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C%83%81%EC%97%85&searchKeywordConjunction=AND#searchDetail/kr/kr_079r_0010_0030_0190_0020/10/5/10/r|고려사 숙종 7년 9월(음) - 유수관에게 화천별감을 파견해 상업을 장려하도록 하다]] 고려는 [[창업군주]] [[태조(고려)]]왕건부터 [[상업]]으로 세력을 키운 [[호족(한국사)|호족]] 가문 출신으로 건국 초기부터 상업을 보호, 육성했다. [[태조(고려)|태조]] 2년(919년)에 [[개경]]의 궁성 동문인 [[만월대#s-5.2|광화문]]에서 남대가(南大街)를 따라 십자가(十字街)에 이르는 중심 도로변에 시전(市廛)이라는 시장을 설치했고 여기서 지배층 및 [[절(불교)|사찰]]과 연계된 상인들이 상업 활동을 했다. 고려 말을 기준으로 [[개경]]에는 최소한 1,200여 칸 이상의 시전 행랑에서 2,400명 ~ 3,600명 이상의 시전 상인이 영업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정부는 시전 운영에 적극 관여해서 각 시전의 판매 품종을 지정했고, 활동하는 상인에 대한 장부를 만들어 철저히 관리했다.(고려사 권85, 지39, 형법2, 금령, 공양왕 2년 4월). 시전 이외에 국가에서 운영하는 주점, 다점(찻집), 식미점 등 관영 상점이 있었는데 이들은 [[화폐]]의 민간 통용을 장려하기 위한 시설로 이용되었다.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를 설치했고, 경시서는 도량형을 감독하고 물가를 조절하며 불법 상행위를 단속하는 일을 했다. [[개성시|개경]] 외 [[평양시|서경]], [[경주시|동경]] 등 전국의 주요 도시에도 개경의 시전과 비슷한 관영 상가가 있었고, 전국 각지에 비상설 시장인 장시(場市)가 열렸다. 고려시대에는 최소한 조선 초기보다 훨씬 활발하게 장시가 운영되었다. [[조선]]의 경우엔 개국과 함께 억상 정책의 일환으로 초기에는 지방에 장시가 열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 필요한 물품에 수요가 없을 수가 없으므로 조선 초기를 지나 1470년경부터 [[전라도]]에서 다시 장문(場門)이라는 이름으로 태동하기 시작해 조선 중후기에 다시 활발하게 열리게 되었다. [[송나라]] 사람 [[서긍]]이 1123년([[인종(고려)|인종]] 1년)에 사신으로 개경에서 한 달을 체류한 후 돌아가 쓴 『[[고려도경]]』에 아래와 같은 글귀가 있다. >고려의 고사(故事)에, 매양 사신이 이르게 되면 사람들이 모여 큰 저자를 이루고 온갖 물화를 나열하는데,… (중략)… 대개 그 풍속이 사람이 살면서 장사하는 가옥은 없고 오직 낮에 시장을 벌여(惟以日中爲虛) 남녀・노소・관리・공기(工技)들이 각기 자기가 가진 것으로써 교역하되 돈을 사용하는 법은 없다. 오직 저포나 은병으로 그 가치를 표준하여 교역하고,… (중략)… 그러나 백성들은 오래도록 그런 풍속에 익숙하여 스스로 편하게 여긴다. >---- >[[고려도경]], 권3 무역. 위 인용문 중 ‘허(虛)’는 허시(虛市), 즉 장시를 의미하는데 특정한 시설물이 없이 빈 터에 장이 섰다가 사라졌기 때문에 허시라고도 했다. 지방의 장시에서는 고려 정부에서 찍어내는 화폐보다는 쌀과 포로 매매가 주로 이뤄졌다. 고려 시대에는 여행객의 편의를 위해 조성된 원(院)이 발달했는데, 이 원은 상인의 숙박 시설을 넘어 그 자체가 상업 중심지가 되기도 했는데 예를 들어 [[한강]]변 [[광주시|광주]]의 사평원은 많은 배가 오가는 중요한 교역처였다. 고려의 지배 이념이자 종교였던 [[불교]] 역시 상업 활동에 호의적이고 사찰이 상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다만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6&cp_code=cp0801&index_id=cp08010005&content_id=cp080100050001&print=Y|고려도경]]에서는 귀족들의 횡포와 사치로 인하여 백성들의 집은 하찮다고 묘사되어있다. '왕성이 비록 크기는 하나, 자갈땅이고 산등성이어서 땅이 평탄하고 넓지 못하기 때문에, 백성들이 거주하는 형세가 고르지 못하여 벌집과 개미 구멍 같다. 풀을 베어다 지붕을 덮어 겨우 풍우(風雨)를 막는데, 집의 크기는 서까래를 양쪽으로 잇대어 놓은 것에 불과하다. 부유한 집은 다소 기와를 덮었으나, 겨우 열에 한두 집뿐이다.' 이는 고려사와 동일한 묘사이다. 몽골 귀족까지 합세한 [[원 간섭기]]와 [[고려 말 왜구의 침입]]까지 고려하면 고려 백성들의 삶은 오랜 기간 동안 그리 좋지는 않았다. 고려 시대의 무역은 공무역(公貿易) 중심으로, [[통일신라]] 시기보다 사무역은 쇠퇴하였으나 화북의 이민족 왕조를 견제하기 위해 고려에 어느 정도 의존하는 송의 외교 상황과 맞물려 문화적 교류는 더욱 활발하였다. 개경에는 [[벽란도]]라는 무역항이 있어서, 이곳에서 무역이 상당히 활발했으며 [[송나라]], [[일본]]의 상인은 물론이고 [[베트남|교지국]], [[태국|섬라곡국]], [[인도|마팔국]]에다가 [[대식국]]의 [[이슬람]] 상인들까지도 거쳐갔다고 한다. 고려는 [[벽란도]]와 같이 수도 개경과 가까운 [[예성강]]하구를 국제무역로로 육성하였는데 이곳에는 송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순천관이 있었고, 외국상인들을 위한 오빈관 등 10개나 되는 외국인용 숙소가 있었다. 이곳에서 개경까지는 동서로 도로를 만들어 놓았고, 뱃사공을 배치하여 사신이 개경에 갔다 올 때까지 선박을 지키게 하였다. 고려의 대학자 [[이규보]]는 벽란도의 붐비는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물결은 밀려왔다 다시 밀려가고, 오가는 뱃머리 서로 잇대었네 >潮來復潮去 來船去舶首尾衡相連 >아침에 여기서 떠나면 한낮이 못 되어 남만에 이른다네 >朝發此樓底 未午棹入南蠻天 >---- >[[이규보]], [[동국이상국집]]에서 또한 [[고려사절요]]에는 배들이 수없이 들어와 값진 보배가 넘쳐나서 중국과 교역하더라도 얻을게 없을 정도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는 문물과 예악이 흥행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며 장삿배가 연이어 내왕하여서 값진 보배가 날마다 들어오니, 중국과 교통하여도 실제로 소득이 없을 것입니다. 거란과 영구히 절교하지 않을 터이면 송 나라와 교통함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하니 따랐다. > ---- ><고려사절요 문종 12년> 한국의 비한자계 외국어 명칭이 [[코리아]](Korea)가 되어 조선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사용되는 것도, 이때 [[이슬람]] 상인들이 '고려'를 그들 식으로 발음한 것이 어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다만 여기에는 다른 설도 있다. Korea란 명칭이 서역에 알려진 것은 751년 [[탈라스 전투]] 때 [[고구려]] 유민 출신인 [[고선지]]의 용맹함이 [[이슬람]] 연합군에 알려지면서라는 설이다. 사실 고려와 고구려는 같은 말인데, '구려'는 옛말로 성, 읍, 나라의 뜻을 가진 단어고 한 글자로 줄여서 부를 때 '려'로 불렀다. 백제나 신라처럼 끝글자인 려를 사용했다. 여제, 나제동맹처럼. 이는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중국 사서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 표기한 흔적에서도 나타난다. 고려의 ㅕ가 탈락하면서, 현대 우리말에도 '고을'이라는 단어로 나타난다. 대신 고려가 [[이슬람]] 사서에 기록된 것은 총 2회뿐이다. 물론 사서에 명시되지 않았다고 비중이 적어졌다고 보긴 힘들 것이다. 앞서 말한 [[송나라]]의 상황이나 코리아의 근원, [[쌍화점]]을 보면 민간에 끼치는 영향은 적지 않았을 수준이었을 것이다. 고려가 가장 빈번하게 교역한 나라는 [[송나라]]였다. 당나라에 있던 [[신라방]]처럼 송나라에, 특히 저장성, 푸젠성 같은 강남지역의 해안지역에 고려인 거주지역이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에서 주로 [[압록강]]을 건너는 육로를 택했던 [[조선시대]]와 달리 고려시대에는 초기에는 [[산둥 반도]]의 등주에서 거의 직선 코스로 [[대동강]] 어구의 초도, [[옹진군(황해남도)|옹진군]], [[예성강]]으로 이르는 길이 중심, 그리고 [[거란|거란족]]의 위협을 느낀 이후로 [[전라도]] 방향으로 항해하기도 했다. 활발하던 양국 간의 무역은 [[남송]] 시대 이후 차츰 쇠퇴했다. [[일본]]은 907년 견당사 파견을 중단한 이후 쇄국정책을 유지하며 [[왕건]]의 국서에 황제국 용어가 쓰였다며 국서를 거절했다. 하지만 현종대 여진해적들에게 잡혔던 일본인 포로를 송환하면서 관계가 본격적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다자이후]]와 [[진해]]를 중심으로 지역적인 경제교류가 진행되었다. 또한 고려는 대마도와 이키섬에 지방관들에게 관직을 주고 규슈지역의 지방관들의 조공을 받으며 왜구방지와 고려인의 해상활동을 보호했다. [[거란]]과는 초창기 이후 국교를 트긴 했지만 교역은 송나라 방면에 비해 활발하지 않았다. 거란은 무역장 설치를 요구하는 등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고려와 [[여진족]]의 교류는 [[금나라]]가 성립되기 훨씬 전부터 있었는데, [[고려사]]에 따르면 [[10세기]] 초반에서 [[11세기]] 초반까지 여진의 추장이 무역을 위해 고려에 온 것이 230여 회나 될 정도로 자주 왕래했다. 고려로서는 경제적 부담이 있었으나, 안보적 측면을 고려해 여진과 교역했다. [[금나라]] 건국 후에는 국경선 부근에 무역장(각장)을 설치해 비교적 활발하게 교역했다. 금나라는 각장에 세금도 부과하고 유출금지 품목이나 동전유출도 금지하였다. 상술했듯 고려 시대에는 [[아라비아]] (대식국, 大食國)인과의 교역도 종종 이루어졌는데, 당, 송 시대 이래로 [[무슬림]]들은 [[광저우시|광저우]] 등 남중국을 중심으로 무역을 했으며, [[송나라]]는 중국 역사상 가장 해외 무역을 장려하는 왕조였기에 이들이 고려에까지 진출했다. 1020년대에서 1040년대에 걸쳐 3차례 100여 명의 대규모 상단이 방문한 것이 확인되며 그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수은]], [[향료]], [[상아]] 등 고려에서 귀한 사치품을 팔았다. 그러나 아라비아 상인단은 송나라의 시박사(市舶司)의 통제를 받았기 때문에 고려와 1대1로 활발하게 교역하기는 어려웠고 주로 송을 매개로 간접적으로 교류하는 쪽이 주류였다. 훗날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세워진 후에도 주변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조선을 가리켜 여전히 '고려'라고 부르기도 했다. [[태조(조선)|이성계]]가 [[홍무제|주원장]]과의 알력으로 [[명나라]] 황제의 책봉을 받지 못하자 [[태조(고려)|왕건]] 때부터 전해 내려온 '고려권지국사'라는 명칭을 사용한 적도 있다. [[당나라]]가 망한 뒤에도 일본에서 중국을 여전히 당이라고 부른 것이나, 일본이 일본이란 국호를 만들었음에도 다른 동아시아국가들로부터 [[왜국|왜(倭)]]라고 불린것과 [[진나라]]가 망했음에도 중국이 차이나라고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 조선 측에서는 이러한 이름을 부담스러워 했고, 바뀌는 데 시일이 걸렸으나, [[한자문화권]]에서는 나라 이름을 조선으로 바꾸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슬람쪽과는 교역이 없었기에, 이슬람과 서양 쪽에 굳혀진 고려라는 이름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대한제국은 영미권에서 Korean Empire로 불렸는데, 대한제국(조선)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멸망시킨 전 왕조의 이름이었기 때문에 기겁하고 Empire of Dai Han 같은 이름을 열심히 밀었지만 끝까지 관철되지는 못했다. [[러시아]]쪽도 마찬가지라 [[중국]]은 [[조선족]]이지만, [[중앙아시아]]에서는 [[고려인]]이다. 정치적 문제도 있지만, 그 이전에 [[러시아어]]로 우리 민족을 조선이 아닌, 고려로 불렀다. 대외적으로 한반도 국가를 가리키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비한자 계통 외국어 이름인 'Korea'가 되어버리고, 심지어는 지리적 지형 자체가 '고려 반도'라는 뜻의 'Korean Peninsula'로 굳어져버렸다. 원 간섭기에 들어서 고려는 세계 제국 [[원나라]]와 단일 경제권이자 제1번국에 속하게 되는데 이는 고려의 외교적 승리라고 볼 수 있다. 정통성이 모자랐던 [[쿠빌라이 칸]]에게 태자 시절 [[원종(고려)]]이 스스로 들어가 신하를 자처했고, 이를 본 쿠빌라이가 "당나라도 무릎꿇리지 못했던 고(구)려가 스스로 내게 왔으니 이는 하늘의 뜻이다!"라면서 대외적 정통성을 강화할 수 있었고,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원나라에서 고려의 대우가 제법 괜찮아졌다. 고려 후기의 대외 교역은 그 양적으로 현대 이전 한국사의 어느 때보다 활발했다. 원나라의 [[지폐]]인 보초(寶鈔)가 고려에서도 활발히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는 [[원말명초]]에 이르러서 악재로 되돌아왔는데, 몽골제국의 무역로인 [[실크로드]]의 중심 중 하나였던 [[중앙아시아]]에서 '''[[흑사병]]'''이 발발, 그대로 원나라까지 들어와서 수백만명이 사망, 경제권이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당연히 이는 상기한 보초가 휴지조각이 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원-고려-일본 가마쿠라 막부 등에 연쇄적인 경제 위기를 가져오고 [[홍건적]]과 [[왜구]] 등의 도적떼가 빈번하게 발생, 결과적으로 세 나라 전부 나라가 뒤집혀 [[명나라]]-[[조선]]-[[무로마치 막부]]로 국가가 교체된다. 이때의 트라우마로, 고려 말기 개혁파 [[신진사대부]]들은 성리학적 상업관(억말론, 抑末論)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에 비판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출신으로 볼때 이들 대다수는 고려 귀족이었으므로, 고려가 상업으로 진흥되었다면 당연히 그 정책을 따랐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본건 전 세계 경제가 파탄나는 시점이었으니 당연히 위험시할 수밖에 없었던 것. 또 백성들이 농업에 집중하기를 장려해 왕조 교체를 거치며 상업 정책도 방향을 달리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