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문단 편집) == 고려사 연구의 어려움 == 고려시대 연구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는 점은 후대의 조선시대와 비교했을때 상대적으로 그 사료의 양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고려는 조선만큼 인쇄술이 보편화되지 않아 서적 편찬량이 많지 않았는데 전란은 상대적으로 더 많이 겪어서 사료의 양에서 조선보다 상대적으로 더 적을 수밖에 없다. 특히 고려 초는 더 심해서, 몇백 년 전인 7세기 삼국통일 당시보다도 사료가 더 적은 편이다. 이 시기는 한중일 3국이 모두 엮여서 기록이 적은 삼국시대 중 유일하게 그나마 기록이 풍부한 시기다. 물론 고려 이전의 정말로 사료와 기록 그 자체가 매우 부족한 [[삼국시대]]와 비교하면 역으로 고려시대의 사료들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많이 남아있는 편이니 어디까지나 후대의 조선과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인 평가라는 부분은 감안해야 한다. 고려시대를 다룬 주요 사서로는 [[조선시대]]에 고려가 남긴 [[고려실록]] 등의 기록을 바탕으로 쓰여진 [[고려사]]와 그 고려사의 요약본인 [[고려사절요]]가 있으며 동시대 [[북송]]의 사신이었던 서긍이 쓴 [[고려도경]]과 [[구오대사]], [[신오대사]], [[요사]], [[금사]], [[송사]], [[원사(역사책)|원사]], [[명사(역사책)|명사]] 등 중국 정사의 외국열전 고려편이 중요 사료들로 꼽힌다. 이 중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후대인 조선시대에 고려실록 등 고려시절 기록들을 바탕으로 편찬된 고려의 역사서인데 고려에도 원본인 [[고려실록]]과 다른 여러 기록들이 있었으나 [[여요전쟁]]이나 [[여몽전쟁]] 등의 전란 때 몇차례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되며, 남아있던 고려실록 또한 [[임진왜란]] 때 모두 다 불타버렸다. 즉,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 초에 남아있던 고려실록 등을 바탕으로 하여 당대의 고려의 기록들을 집대성해서 만든 고려시대 전반에 관한 내용을 총합 편찬한 유이한 정사(正史) 사서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들은 모두 사료로서 가지는 기본적인 편파성이 있다. 일단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조선]]의 입장에서, 나머지 사료들은 [[5대 10국]] 시대의 각 국가들, [[요나라]], [[금나라]], [[북송|송]][[남송|나라]], [[원나라]], [[명나라]]의 입장에서 바라본 고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다만 스스로의 역사를 총합적으로 서술한 예는 드물 수밖에 없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당대의 기록들을 제외한 멸망한 전 왕조에 대한 총합적인 역사서는 후대의 계승국들이 편찬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가 남긴 역사서들에서도 마찬가지인 부분으로, 고려시대에 그 이전 시대의 삼국을 바라본 역사서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조차 이러한 편파성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 두 역사서는 모두 [[삼국시대]]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들을 서술했지만 엄연히 당대 고려의 시각에서 고대를 해석하여 정리하고 편찬한 고려의 입김이 들어간 사서들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후삼국시대 당시 [[왕건]]의 [[역성혁명]] 이후 고려가 남긴 [[궁예]]에 대한 기록들에 대해서도 고려측의 역성혁명 정당화를 위한 왜곡과 편파성이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는 학계의 비판적인 의견들[* (최연식, 「강진 무위사 선각대사비를 통해 본 궁예 행적의 재검토」, 『목간과 문자』 제7호, 한국목간학회, 2011.06) , (김주성, 궁예와 고려 태조의 농민정책에 대한 재검토,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제47호, 2019.12) , (최웅, 역사 기록과 구전 설화로 본 궁예,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인문과학연구 제27집, 2010.12)]이 나올 정도로 이런 논란은 거의 대부분의 사서에서 항상 나오는 보편적인 논란들이다. 그나마 [[고려실록]] 등 고려측이 스스로 남긴 기록들을 바탕으로 [[세종대왕]]이 각별히 신경을 써서 편파성을 최대한 줄인 [[고려사]]와 그 고려사의 축약본인 [[고려사절요]]는 실록에서의 세종의 여러 발언들에서 알 수 있듯이 객관성을 최대한 유지한 편이다. 물론 고려가 멸망한 이후 조선 초기에 고려의 사초를 바탕으로 편찬되었는데, 아무래도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위해 당대 조선측의 시각이 들어갈 수밖에는 없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고려 말기의 사건들(특히 [[공민왕]], [[우왕]], [[창왕]]시기)은 고려사에서의 [[궁예]]에 대한 여러 논란들처럼 여러모로 다른 의견들도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다. 거기다 원본인 고려실록을 바탕으로한 요약집이나 다름없어 텍스트 분량 자체가 [[조선왕조실록]]과 비교했을 때 많이 부족한 편이다. 물론 비교 대상인 조선왕조실록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방대한 양인 점은 고려해야 한다. 그외 고려가 스스로 남긴 다른 기록들이 고려와 그 이후에 겪은 여러 전란으로 크게 손실된 점 또한 안타까운 부분이다. 고려도경과 [[구오대사]], [[신오대사]], [[요사]], [[금사]], [[송사]], [[원사(역사책)|원사]], [[명사(역사책)|명사]] 외국열전 고려편의 경우, 사신단의 교류와 고려에 심어놓은 [[간첩|스파이]]를 통해 보고 들은 정보를 기록하여 [[5대 10국]] 시대의 군주와 [[요나라]], [[금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황제에게 올린 보고서 성격의 사료이기 때문에 [[주마간산]], [[수박 겉 핥기]] 수준이다. 몇 가지만 들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의 역사와 관리 등급을 설명하는 부분이 [[고구려]]와 뒤섞여 있다. 또한 서긍은 고려가 바닷가에 위치해 있으면서 [[선박]]이 지극히 단순하고 조잡하며 작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토벌하면서 일본까지 원정을 갈 정도로 선박 / 항해 기술이 뛰어났고([[과선]] 문서 참조), 근래 고려시대의 고선 발굴을 통해 대형선의 존재도 입증되었다. 물론 당시 서긍 일행이 타고 온 사신선인 신주(神舟)에 비하면 보잘 것 없을지 몰라도, 신주 자체도 당대 [[송나라]]의 엄청난 기술력과 자본을 투자해 만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의 선박 수준은 전혀 낮은 수준이 아니다. 더구나 원래 문서에는 도경이란 표현처럼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이게 세월이 흐르면서 난리통에 다 날아갔다. 때문에 위의 사료들은 모두 사서라면 기본적으로 거쳐야 하는 철저한 교차검증이 필요하다. 고려에도 분명히 [[실록]]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전부 유실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중 선조수정실록을 보면, 원래 한성 춘추관 사고에 고려 실록이 보존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유실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안의, 손흥록 등이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를 수 있었다. 다만 조선왕조실록이 고려실록의 것을 전범으로 삼았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 외에 [[이규보]] 등의 문집 등 고려시대 사람들이 남긴 기록들이 일부 있기는 하지만 이것만으로 고려시대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드물게 문중에서 고려 시대 문서가 나온다 해도 그 수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 오죽하면 고려 시대 관직 임명장은 나오면 보물급이라는 말까지 할 정도다. 이 때문에 고려사 연구자 대부분은 당연하지만 한문을 기본 소양으로 장착하고 그중 일부는 [[몽골어]], [[만주어]] 등 다양한 언어들까지 배우면서 사료 탐색에 열을 올리고 있다. 또한 다른 난관을 하나 뽑자면 고려 유적지 접근의 한계를 들 수 있다. 고려 수도인 개성은 현재의 북한령이라 북한과의 긴밀한 협력 없이는 [[만월대]]나 [[고려왕릉]] 등 주요 유적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려시대 연구는 특히 [[남북관계]]가 진전되면 활성화되고 반면 남북관계가 경색되면 더뎌지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그나마 고려 왕조가 [[강화도]]를 수도로 삼은 기간이 있어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문제는 강화도는 임시 수도격이었기 때문에 본 수도였던 개성과 기간 면에서나 남아있는 문화유산의 질적 수준에 있어서나 격차가 상당한 편이다. 남한에 남아있는 고려왕릉 중 가장 잘 보존된 무덤이 [[고종(고려)|고종]]의 [[강화고려홍릉|홍릉]]인데 아무래도 고려 국력이 약했을 시기이고 또한 왕실보다 최씨 무신정권의 권세가 막강했던 시기라 개성의 무덤들이나 조선 및 신라의 왕릉들과 비교해 보았을 때 양식도 간소하고 초라한 편이다. 병풍석도 안 둘러져 있고 인물석도 솜씨가 매우 투박하다. 솔직히 말하면 왕릉이란 요소를 제외하고 외관만 보았을 때는 조선시대 권세가 무덤보다도 허접한 편이다. 게다가 대상으로 삼은 홍릉이 남한 소재 고려왕릉 중 상태가 가장 나은 편이고 다른 무덤들은 더 심각한 편이다. 그런데 단순히 남한의 고려왕릉만이 그러한 게 아니라 북한에 소재한 대다수 왕릉 가운데에서도 [[왕건]]의 현릉, [[공민왕]]의 현정릉, 그리고 주인이 불분명한 칠릉군의 몇 기 정도를 제외하고는 문인석 등의 석상이 [[신라왕릉]]이나 [[조선왕릉]]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매우 투박한 편이다. 자세한 내용은 [[http://blog.naver.com/minsu977/221112556427|고려왕릉에 대해 자세히 정리된 글]]에서 참고. 아무튼 이러한 연유로 고려시대 연구는 조선시대는 물론 삼국시대의 백제, 신라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제약이 많이 따르는 편이다. 한편 [[북한]]이 가난해지면서 [[평양]]과 [[개성시|개성]] 등의 수많은 문화재들을 [[중국]]에 팔고 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832599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