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문화 (문단 편집) == [[불교]] == 초기부터 사실상 불교가 국교화되었을 정도로 불교가 흥성한 시대였던 만큼 불교 문화 역시 융성한 발달을 이뤄냈다. 해동 천태종을 일으킨 [[의천]]과 [[조계종]]을 세운 [[지눌]]의 사상은 오늘날 한국 불교계에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고려 불교의 특징은 화려한 귀족문화와 더불어 왕실과 귀족 세력의 후원을 받아 세를 불렸다는 것인데, 특히 [[흥왕사]]나 귀법사같은 대형 사찰부터 [[팔만대장경]]이나 [[초조대장경]]같은 대장경 주조도 왕실의 후원으로 이뤄졌다. 태조 [[왕건]]이 지은 훈요10조에도 불교 장려와 관련된 내용이 있으며 [[성종(고려)|성종]]당시 최승로의 건의로 [[팔관회]]와 [[연등회]]가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는 했지만 [[현종(고려)|현종]]때 부활하여 고려 멸망때까지 계속 진행되었다. 대신 현재의 천태종과 [[태고종]], 천태종은 사상적 시조를 고려 ~ 여말 선초기로 잡고는 있지만 고려 시대의 같은 이름의 종파와 직접적인 연관성은 없다.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한국 불교는 종파주의를 유지할 수 없어 종파보다 승려간 사제 관계를 중시하는 문중 불교 형태로 변모했고, 종파적 특성도 약해져 다양한 종파가 혼재되어 있는 통불교 형태로 변했다. 물론 한국이 이게 좀 심해서 한국 불교의 특성으로 내세울 정도긴 하지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똑같이 근세로 오면서 불교가 약세에 들어간 중국도 어느 정도 비슷한 현상은 있다.(일본 같은 경우는 [[오다 노부나가|아예...]]) 불교 문화가 발전하면서 경전들이 다수 쓰여진 시기기도 한데 이에 따라 출판 기술도 꽤 발달해 서양보다 200년 이상 앞서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가 개발됐다. 공식적으로는 1234년 상정고금예문의 재인쇄를 주자(鑄字)로 한 자료가 있으며 남아있는 출판물로는 1377년의 직지심체요절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최근 들어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본(보물 제758-2호)이 금속활자본이라는 주장도 제기되는데,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직지심체요절]]보다 138년 앞선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 출판물이 될 것이다. 자세한 사항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항목]] 참조. 활자 유물의 경우 14세기 후반의 고려활자 복(復) 자 한 글자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2010년]] 11세기 후반 ~ 12세기 초반의 것으로 추정하는 [[증도가자]] 24자의 떡밥이 생겼으나, 결국 5년 뒤 [[증도가자]] 유물은 진품이 아닌 '''조작'''으로 판명났다. >三,,삼,,藏,,장,,寺,,ᄉᆞ,,애 블 혀라 가고신ᄃᆡᆫ >그 뎔 社,,샤,,主,,쥬,,ㅣ 내 손모글 주여이다 >...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그 잔 ᄃᆡ가티 더ᇝ거츠니 업다 >---- >삼장사에 불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가 내 손목을 쥐더이다 >... 그 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그 잔 데같이 답답한 곳이 없다 >---- >'''고려가요 쌍화점(雙花店) 中''' 중기를 고비로 불교는 점점 타락하기 시작하였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서는 절에서 [[술]]을 빚어 마시며 놀고, [[세금]]도 면제 받으며 [[노비]]까지 하사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려가요]] [[쌍화점]]에서도 절의 지주가 여인의 손목을 잡은 뒤, 같이 잠자리에 들었다는 묘사가 나온다. 이렇듯 불교의 세력화는 결국 고려 망국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