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왕조 (문단 편집) === 초기 === ||<#FFD700>'''1.[br][[왕건|{{{#800080 건}}}]]'''[br]{{{-2 +[[신혜왕후|{{{#800080 류씨^^1^^}}}]]}}} || ||<#FFD700>{{{-2 +[[장화왕후|{{{#800080 오씨^^1^^}}}]]}}} ||<#FFD700>'''2.[br][[혜종(고려)|{{{#800080 무}}}]]'''[br]{{{-2 +[[의화왕후|{{{#800080 임씨^^진주2^^}}}]]}}} ||<#FFC0CB>{{{#800080 임씨^^진주3^^}}} || ||<#FFD700><|10>{{{-2 +[[신명순성왕태후|{{{#800080 유씨^^1^^}}}]]}}} ||<#FFD700>'''3.[br][[정종(고려 3대)|{{{#800080 요}}}]]'''[br]{{{-2 +[[문공왕후|{{{#800080 박씨^^승주2^^}}}]]}}} || ||<#FFD700>{{{-2 +[[문성왕후|{{{#800080 박씨^^승주3^^}}}]]}}} ||<#FFC0CB>{{{#800080 박씨^^승주4^^}}} || ||<#FFD700><-2><|4>'''4.[br][[광종(고려)|{{{#800080 소}}}]]'''[br]{{{-2 +[[대목왕후|{{{#800080 황보씨^^2^^}}}]]}}} ||<#FFD700>'''5.[br][[경종(고려)|{{{#800080 주}}}]]'''[br]{{{-2 +[[헌숙왕후|{{{#800080 김씨^^2^^}}}]]}}} || ||<#FFD700>{{{-2 +[[헌의왕후|{{{#800080 유씨^^7^^}}}]]}}} || ||<#FFD700>{{{-2 +[[헌애왕후|{{{#800080 황보씨^^3^^}}}]]}}} ||<#FFD700>'''7.[br][[목종(고려)|{{{#800080 송}}}]]''' || ||<#FFD7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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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청작업도 진행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숙청 작업은 그의 아들인 주도 위태롭게 만들었다. 물론 주가 유일한 아들이었기에 살아남아서 경종으로 즉위하게 되었지만 이런 영향력으로 인해 그의 재위기도 순탄치만은 않게 되었다. 한편 경종은 모두 사촌들과의 혼인관계를 맺게 된다. 자신과 마찬가지로 태조의 자 첫 번째 부인인 헌숙왕후 김씨는 고모 낙랑공주가 경순왕과 혼인해서 얻은 딸로 그의 고종사촌이 되고, 두 번째 부인 헌의왕후 유씨는 삼촌인 문원대왕의 딸로 사촌지간이 된다. 하지만 둘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봤을 때에는 오래 못가서 죽은 것으로 보인다. 세 번째 부인과 네 번째 부인이 되는 헌애왕후 황보씨와 헌정왕후 황보씨는 모두 경종의 어머니 대목왕후의 남동생인 대종과 태조의 6번째 부인 정덕왕후 유씨의 딸인 선의왕후 유씨의 딸로 한마디로 경종에게는 외사촌이 된다. 마지막 후궁은 대명궁부인 유씨도 자신의 고모 흥방궁주와 역시 정덕왕후 유씨의 아들 원장태자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어서 역시 고종사촌이 된다. 하지만 이 사이에서 경종의 유일한 자식인 송을 낳은건 헌애왕후 황보씨가 유일했다. 경종은 재위 후반부에 몸이 상하게 되어 결국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게 되었고, 그의 아들 송의 나이가 어린 탓에 경종은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여 자신의 외사촌이자 자신의 누이인 문덕왕후의 남편이고 또한 두 아내들의 오빠가 되는 치 즉 성종에게 왕위를 물러주게 된다. 성종은 유교에 입각한 정치를 펼치며 여러 개혁 작업을 펼치면서 고려를 반석 위에 올려놓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딸들만 낳았고 본인이 송을 대신해 올랐다는 점 때문인지 이른 시기부터 송을 자신의 후계로 삼았다. 한편 이 때쯤 되면 고려에는 왕건의 직계 자손의 씨가 거의 마르는 사태가 발생하는데 이렇게 된 점에는 광종 대와 경종 대에 있었던 여러 숙청과 중첩되어 누적되어온 근친혼의 결과라 볼 수 있겠다. 그로 인해 성종의 누이이자 선대 군주인 경종의 네 번째 부인인 헌정왕후 황보씨와 태조의 다섯 번째 부인인 신성왕태후 김씨의 아들 욱이 사통해서 낳은 순, 그리고 성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송 즉 목종만 남게 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물론 태조의 15남인 효은태자의 자손이 있었으나 효은태자가 광종 대에 반란 혐의로 처형을 당했던지라 사실상 왕위계승에서 밀린 상황이었다.] 그래서 유교를 중시한 성종이었음에도 순을 궁궐에서 키우게 되는 계기가 된다. 목종이 왕위에 오르게 되지만 그의 어머니인 헌애왕후가 천추태후가 되어 국정을 좌우하게 되고 그 천추태후는 자신의 애인인 김치양을 궁궐로 들이고 그와의 사이에서 자식도 보는 등 여러모로 고려 왕조에는 위기가 찾아오게 된다. 천추태후는 자신과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왕위에 가장 가까웠던 순을 절로 보내고 암살까지 시도하는 등 여러 작업들을 하게 되지만 강조의 정변을 맞게 되어 결국 목종이 폐위당하고, 순이 즉 현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현종은 두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입을 맞았지만 최악의 위기속에서도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면서 고려를 반석위에 올리게 되고, 당시 사람들로부터 요순에 비유될 정도의 업적을 남기게 된다. 이후 고려왕계는 현종의 자손들로 이어지게 된다. 현종의 장남 흠, 차남 현이 차례로 덕종, 정종으로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덕종의 경우에는 딸만 있어서 그대로 정종에게 이어졌고, 정종의 경우에는 자식이 있었으나 자신이 꽤나 젊은 나이에 죽고, 아직 자식들이 어린 점, 그리고 동생인 휘가 꽤나 뛰어난 면모를 보였기에 그에게 왕위가 이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