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왕조 (문단 편집) === 후기 === ||<|12><#FFD700>'''24.[br][[원종(고려)|{{{#800080 식}}}]]'''[br]{{{-2 +[[순경태후|{{{#800080 김씨^^전주^^}}}]]}}} ||<|7><#FFD700>'''25.[br][[충렬왕|{{{#800080 거}}}]]'''[br]{{{-2 +[[제국대장공주|{{{#800080 쿠틀룩켈미시}}}]]}}} ||<|5><#FFD700>'''26.[br][[충선왕|{{{#800080 장}}}]]'''[br]{{{-2 +{{{#800080 예수진}}}}}} ||<#FFC0CB>[[광릉군|{{{#800080 감}}}]] || ||<#FFD700><|4>'''27.[br][[충숙왕|{{{#800080 만}}}]]''' ||<#FFC0CB>[[용산원자|{{{#800080 ?}}}]] || ||<#FFD700><|2>'''28.[br][[충혜왕|{{{#800080 정}}}]]''' ||<#FFD700>'''29.[br][[충목왕|{{{#800080 흔}}}]]''' || ||<#FFD700>'''30.[br][[충정왕|{{{#800080 저}}}]]''' || ||<#FFD700>'''31.[br][[공민왕|{{{#800080 전}}}]]''' ||<#FFD700>'''32.[br][[우왕|{{{#800080 우}}}]]''' ||<#FFD700>'''33.[br][[창왕|{{{#800080 창}}}]]''' || ||<#FFD700>{{{-2 +{{{#800080 ?}}}}}} ||<#FFC0CB>'''[[덕흥군|{{{#800080 혜}}}]]''' || ||<#FFD700>{{{-2 +{{{#800080 김씨^^언양^^}}}}}} ||<#FFC0CB>{{{#800080 26-1}}} || ||<|5><#FFD700>{{{-2 +[[정화궁주|{{{#800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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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충렬왕이 다시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한편 충렬왕은 자신의 며느리 계국대장공주를 다른 고려 왕족과 혼인 시켜서 그의 아들인 충선왕의 즉위를 막고자 하였다. 결국 충렬왕과 충선왕 즉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활을 건 다툼은 원의 황위계승과도 맞물리게 된다. 당시 충렬왕은 안서왕 아난다를 밀었고, 충선왕은 카이산 형제를 밀었는데 충선왕이 폐위되어 원에 머무르던 시절 때 카이산 형제와 어울러 지냈기에 이런 지지가 가능했고 카이산이 새로운 황제로 오르게 되자 충선왕의 위치는 그야말로 막강해지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아들과의 다툼에서 실패한 충렬왕은 쓸쓸하게 고려로 돌아와서 죽게 되었고 충선왕이 다시금 고려 군주로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충선왕은 이미 원의 생활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결국 고려에 머무르지 않고 다시금 원의 대도에 머무르면서 전지정치를 행하게 된다. 이러한 전지정치는 당연히 문제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고, 고려에 있는 신하들은 충선왕의 귀국을 지속적으로 요청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세자 감을 왕위에 올리려는 시도가 생기자 결국 충선왕이 세자를 죽이는 사태까지 발생하고 만다. 하지만 얼마 못가 충선왕은 왕위를 강릉대군 왕만에게 물러주게 된다. 이후 충선왕은 원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심지어 원 최고 직책인 우승상자리까지 제안받게 되지만, 그러한 권력으로 인해 반대파의 참소를 받고 티베트로 유배를 가게 된다. 이후 계국대장공주의 남동생인 태정제에 의해 돌아오게 되었지만 더이상 원에서 중용되지 않았고 이후 대도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새로이 고려 왕위에 오른 만 즉 충숙왕은 여러모로 좋은 정치를 펼치고자 하였으나 아버지 충선왕이 심왕의 자리를 자신의 이복조카 왕고에게 내주는 바람에 왕고에게 끊임없이 왕위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그 가운데서 자주 원나라로 송환되는 상황이 되면서 지쳐버려서 자신의 아들 정에게 양위하고 원나라로 건너가게 되지만, 왕위에 오른 정, 즉 충혜왕은 역대급 폭군이어서 결국 2년만에 폐위당하고 다시금 충숙왕이 왕위에 오른다. 하지만 복위한 충숙왕은 정사에 손을 놓은 상황이었고, 얼마 못가 죽었다. 이후 다시금 복위한 충혜왕은 역시나 폭군의 행태를 보이다가 결국 폐위당하고 만다. 이후 충혜왕의 어린 아들인 흔이 충목왕으로 왕위에 오르나 어머니인 덕녕공주의 섭정을 받다가 어린 나이에 자식 없이 죽고 말았고, 이후 충목왕의 동생인 저가 충정왕으로 왕위에 오르나 역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는 바람에 어머니인 희비 윤씨 세력의 발호가 심해진 상황이었고 결국 어린 군주들로는 고려가 버티지 못한다고 생각한 고려 조정에서 충숙왕의 차남이자 충혜왕의 동복동생인 강릉대군 전을 왕위에 오르는 것을 원에 요청했고 이를 원이 받아들이면서 충정왕도 폐위되고 말았다. 새로이 왕위에 오른 전 즉 공민왕은 부원세력을 척결하고, 쌍성총관부를 되찾는 등 여러 개혁정책을 통해 고려의 국운을 다시금 일으키려 하였으나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을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지게 되었고, 재위 후반부는 암군의 행태를 보이면서 말년에는 시해당하는 상황이 발생되었고 공민왕의 유일한 아들이었던 우는 왕위에 올라서 할머니 명덕태후의 섭정을 받았지만 본인을 왕위에 올린 이인임의 기세가 상당한 편이었고 결국 이 기세에 밀리면서 막장 행보를 보인다. 하지만 우는 성장하면서 원이 북쪽으로 완전히 쫓겨난 상황을 통해 부원세력이자 권신이었던 이인임을 최영-이성계 연합을 통해 몰아내는데 성공하며 성공적인 군주가 될 기회를 얻게 된다. 하지만 명의 철령위 요구로부터 시작된 요동정벌 움직임으로 인해 최영과 이성계가 갈리게 되었고, 요동정벌을 반대한 이성계가 쿠데타인 위화도 회군을 일으키면서 순식간에 이성계가 권력의 중심이 되었고, 그로 인해 우는 이성계 등의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이로 인해 왕위에서 폐위당한다. 이후 우의 아들 창이 옹립되지만 얼마 못가 우가 공민왕의 아들이 아닌 신돈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창이 폐위당하게 되고 우와 창 둘 다 모두 귀양지에서 각각 25살과 10살의 나이로 처형당하게 되면서 오랫동안 이어져오던 고려의 직계는 여기서 끊기게 된다. 이후 왕위에 오른 사람인 정창부원군 왕요는 한참 전에서 갈라져 나온 계보인지라 고려왕조는 사실상 끊긴 것이나 다름 없다 봐야 하고, 얼마 못가 이성계에 의해 폐위됨에 따라 고려 왕조는 475년만에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