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군 (문단 편집) == 해군(수군) == 고려 초기~ 중기에는 [[과선]](戈船)을 전투함으로 사용했고 대몽항쟁이 끝나는 원간섭기 시점에서는 [[누전선]](樓戰船)을 주력 전투함으로 이용하였다. 왕건이 태봉의 장군으로 있던 시절에 만든 배는 '''갑판에서 말을 달릴 수도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고려사에 나온다. 관련 제도를 정비하고 삼남 지방에 수백 척의 정규 함대를 체계적으로 육성해 수만 규모의 해군을 상하번으로 운용한 [[조선 수군]]과 달리, 고려는 중앙의 수천을 제외하고는 필요할 때 민간 선박을 징발해 급조하는, 즉 정규군으로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재미있게도 정규 수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은 일본도 비슷했는데, 지방 권력이 중앙 정부보다 강했던 일본도 정부 주도로 체계적인 정규 수군을 조직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에서 해상 활동에 종사하던 아마비토(海民)라 불리는 바닷가 주민들을 현지 고쿠시나 슈고들이 휘하에 조직화해서 해상 무사단을 꾸렸으며 필요할 때마다 소집해서 이용하는 식이었다. 단지 정규 조직으로써 해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만 가지고 고려의 해상 국가로써의 면모를 과소평가 내지는 과장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지나친 해석이다.] 차이가 있다. 이유는 비용 문제로 여겨지는데, 건국 초기부터 [[거란]]이라는 강력한 국가를 주적으로 상정하다 보니 모든 군사력이 개경과 북방에서 육군을 중심으로 짜여졌다.[* 조선의 경우는 개국 군주부터가 왜구 토벌의 공적을 바탕으로 민심을 얻었고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의 명분에도 왜구가 포함되어 있었던 만큼 왜구 방비 문제에 싫어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명나라를 명목상 대국으로 섬기겠다고 천명한 판에 북쪽으로 명나라와의 국경에 병력을 투입하기는 어려웠다.] 추정 인구 300만으로 30만 군대를 끌어모은 고려는 중앙과 북방의 병력 유지에 현지 물자뿐 아니라 삼남의 물자도 투입해야 했으니 대규모 해군을 상시 유지할 순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수적으로 규모가 조선 수군에 비해 작은 것과는 별개로 중앙군에 별도의 편제를 만들어 놓을 만큼 위상 자체는 낮지 않았다. 개국 초기부터 후백제와의 전투에 수군을 동원해 나주를 공략하기도 했던 만큼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지방에는 선병도부서라는 수군 관서가 지금의 함경남도 [[원산시]]인 진명현(鎭溟縣)과 존재했고, 지금의 경상도 동해와 남해 일대의 예주(禮州: 영덕군 영해읍), 울주(蔚州: 울산), 양주(梁州: 양산), 금주(金州: 김해) 등 4곳에 방어사(防禦使)를 두고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慶州)와 아울러 동남해도(東南海道)라는 행정구역을 정하고 동남해도부서(東南海都部署)를 두어 해안 방어와 대일 교섭을 맡았는데, 마찬가지로 [[1049년]]과 [[1060년]] 쓰시마 섬에서 표류해 온 고려인들을 김해를 통해 고려로 돌려 보낼 때에도 동남해선병도부서가 관련 업무를 맡아 조정에 보고했다. 동남해선병도부서의 본영은 이후 문종 때에 경주에서 김해로 옮겨진다. 초기 선병도부서의 해안 방어의 대상은 왜구 그리고 '''여진족 해적'''이었는데, 고려로부터 '동번'이라 불리며 고려 조정에 조공하고 관직도 받아갔던 이들은 현종 때에는 [[고려 거란 전쟁]]으로 동북변 경비가 소홀한 틈을 타서 지금의 함경남도와 강원도, 경상도에 이르는 한반도 동해안 군현들을 습격하고 있었다. [[1019년]] 여진족 해적이 고려 해안은 물론 일본의 쓰시마와 이키 및 [[다자이후]]까지 쳐들어가 약탈을 벌이고 인민을 납치해 가는 사태가 벌어졌을 때, 귀환하던 이들 해적을 동남해도부서 소속 고려 수군이 그 귀환하는 길에 공격해서 포로로 잡혀 있던 일본인 259명을 구하여 김해를 거쳐 일본으로 돌려보냈다. 일본 역사에서 '도이의 입구(刀伊の入寇)'라 불리는 사건이다. 이때 일본은 다자이후까지 쳐들어와 인민을 약탈한 해적의 주체 및 배후가 고려가 아니냐고 의심했지만, 이들 해적이 약탈한 포로 가운데에는 고려인도 많았던 데다[* 도이가 일본에 출몰하기 1년 전에 울릉도의 우산국이 도이들에게 공격을 당해 아예 나라 자체가 멸망해 버렸다. 이때 우산국 난민들은 고려로 도망쳐 왔고, 고려가 울릉도라는 섬을 직접 관리하게 된다.] 결정적으로 고려 수군이 이들을 진압하고 포로로 잡혀 있던 일본인들을 구출해 돌려 보냄으로써 서로 관련이 없음을 인증했다. 일본을 공격했던 해적의 정체가 여진족이며 고려에서는 '도이'라고 불리는 족속들이라는 것도 진작에 일본측이 해적의 침공 당시 잡은 고려인 포로들로부터 얻은 정보였다. 하지만 일본 조정은 도이 해적은 고려 수군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이 확인된 뒤에도 예전 신라 해적들이 일본 서해를 휩쓸며 일본 조정의 견면을 약탈했던 과거도 있고, "'''여진족은 고려에 조공하는 애들이니 이번 도이라는 것의 침공도 고려에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며 고려에 대한 불신을 거두지 않았다. 도이 해적과 약탈을 함께하다 포로로 잡힌 이들 중에 고려인이 세 명 끼어 있기도 했고. [[조위총의 난]] 때 상설 편제 해군을 거느린 서경군과 개경군이 내전을 벌이는 과정에서 고려 수군은 치명타를 입었으나 [[삼별초]]가 유명무실해진 중앙군 조직을 대체해가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 재건했고 몽골과의 전쟁으로 강화도로 도읍이 옮겨가 더욱 중요해졌다. 그리고 고려 해군의 항해술은 몽골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몽골군]]이 1차 [[일본]] 원정 실패 이후 "[[남송]]의 배는 금방 부서지는데, 고려의 배는 튼튼하니 다시 일본을 공격할 수 있다"고 좋은 평가를 내렸다. 그러다 고려 후기에는 나라가 기울면서 해군도 완전히 쇠퇴하며 유명무실해졌다. 배는 조운이나 대외 교역을 위해서라도 계속 만들어졌으므로 항해 기술 자체는 보전하고 더욱 진보했다고 하지만, 그 배를 사용할 수군을 양성하는 데 있어서 원나라의 눈치를 많이 봐야 했기 때문이다. 원으로 도망친 고려인들이 걸핏하면 "고려 조정은 기회만 있으면 언제든 강화도로 들어갈 틈만 노린다"고 참소를 거듭해 원에서 아예 고려의 선병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기록도 고려사에 남아 있을 정도다. 선천적으로 해상전에 쥐약이기도 했고, 고려가 대몽항쟁을 명분으로 강화도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나 이후에도 삼별초가 바다를 옮겨 다니며 해상에서 자신들을 공격하는 등 고려의 바다에 결코 좋은 기억은 없었던 원은 고려가 강화도로 들어가겠다는 말만 나와도 발끈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원의 눈치를 보며 수군을 제대로 양성하지 어려웠던 환경상의 약점은 이후 그것이 노출되면서 고려 후기의 사회를 제대로 흔들어 놓는다. 14세기 원의 퇴조 및 일본에서의 정세 변동으로 초래된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때 고려는 제대로 된 수군을 갖지 못하고 있던 상태에서 왜구를 제대로 막지 못하여 심대한 피해를 초래했다. [[최영]]을 중심으로 고려군 수뇌부는 해군을 재건하는 걸 넘어 확대, 증강하기 위해 사력을 기울였다. [[최무선]]이 개발한 화포가 도입되고, [[정지]]에 의해 수기신호 체계가 정착했다. 이렇게 각고의 노력으로 정립된 대 왜구전 교리는 [[진포 해전]]과 [[관음포 전투]]에서 왜구들을 격파하고 서해안과 남해안의 제해권을 되찾게 만들었고 [[박위]]의 [[대마도 정벌]]을 거쳐 [[조선 수군]]으로 이어진다. '해군'이라는 이름은 고려에서 처음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의 직제에서 해군장군(海軍將軍), 해군대장군(海軍大將軍) 등 해군(海軍)이라는 이름이 보이고 있는 것. 이밖에도 수군이나 선사(船師), 선병(船兵)이라는 용어도 같이 쓰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