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군 (문단 편집) == 병력 규모 == 고려의 병력 동원력은 전근대 한국사 왕조들 중에서도 이례적으로 엄청난 수준이었다.[[https://blog.naver.com/bronckhorst/222059001559|#]] 역사서에도 고려가 외침에 맞서 대규모 병력을 여러 차례 동원한 사례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사서의 기록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결과일 뿐이며 실제 고려가 동원한 병력은 이보다 훨씬 적었을 것이라고 보는 주장'''과 '''크게 과장되지 않은 사실이라고 보는 주장'''이 둘 다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 태조는 8만 7,500(고려사)에서 10만(삼국사기)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하였다고 기록되어있지만 오늘날의 학계 일각에서는 실제 동원된 병력은 훨씬 더 적었다고 추정하는 견해 또한 분명 존재한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한국사(도서)|신편 한국사]]》의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 구조》 중 [[http://db.history.go.kr/item/level.do?sort=levelId&dir=ASC&start=1&limit=20&page=1&pre_page=1&setId=-1&totalCount=0&prevPage=0&prevLimit=&itemId=nh&types=&synonym=off&chinessChar=on&brokerPagingInfo=&levelId=nh_013_0040_0010_0010_0010&position=-1|군사 조직]] 편에서 해당 파트의 집필자인 조인성 교수는 이러한 기록들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의 전쟁사에 흔히 나타나는 병력 과장 사례[* H. Delbrück, History of the Art of the War within the Political Framework, Vol. 1:Antiquity, trans. W.J. Renfroe, Jr. (London:Greenwood Press, 1975), 30쪽 이후 참조.]의 하나로 보았다. 조인성 교수 외에는 정경현 또한 이와 비슷한 주장을 먼저 한적이 있다.[* 정경현, 고려 태조의 일리천 전역, 한국사연구, 1988] 반면 고려 초기 군제사나 후삼국 통일 전쟁사와 같은 주제에 천착한 이기백(고려병제사연구), 김갑동(고려의 후삼국 통일과 후백제), 임용한(전쟁과 역사 1), 이도학(후삼국시대 전쟁 연구), 류영철(고려의 후삼국 통일 과정 연구) 등 주요 연구자들은 저와 같은 사료상의 수치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고려처럼 열에 하나가 군인인 준병영국가화된 케이스가 전근대 동아시아사에 아주 드문일도 아니었다. 조위와 대치한 촉한도 열에 하나가 군인으로 추정되며, 인구 1억의 송과 적대한 추정인구 3~500만 서하는 장정들도 모자라서 전쟁포로와 외국인 용병, 여군들까지 정규편제로 존재했으니 고려 이상으로 심각했다. 압도적인 체급의 국가를 적국으로 돌렸을때는 이런식으로 무너지지 않을 정도로 백성들에게 부담을 가중시켰다. 여요전쟁등의 국토방위전쟁에서 실제로 10만 이상의 병력을 동원하였을것으로 추정되지만 이들 병력중 상당수는 농번기에는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는 훈련을 받는 부병의 수준도 못되는 말 그대로 농사나 짓다 창하나 쥐고 급조되어 끌려온 잡병수준이었다.[* 군역을 지지않는 농민층을 백정(白丁)이라고 하는데 정말로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이들도 전쟁에 투입되었다.] 당장 위에 서술되어있는 전기 고려군의 편제만 봐도 정규군이라 할수 있는 2군6위의 장부상 병력이 4만5천을 넘지 못했고 이조차도 군인전의 부족으로 붕괴되어 갔다. 대규모 외침같은 예외적 상황을 제외하면 이 정도 규모가 고려가 보유한 인적, 물적 자원의 최대 한계치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육군 * [[후삼국시대]]의 [[일리천 전투]]: 8~9만명(기병 4만 7천 5백기/ 보병 약 4만명). (상술한것처럼 현재 사학계에서는 이 수치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 [[정종(고려 3대)|정종]] 시기 예비군 [[광군]]: 30만명[* 실제로는 전투부대가 아니라 단순한 육체노동을 제공하는 '''노동부대'''였다.] * [[여요전쟁]]: 2차 30만명[* [[통주 전투]]에서의 동원 병력이다. 통주 전투는 한국사에서 가장 큰 회전이었다. 고려군 30만과 거란군 20만, 도합 50만 대군이 싸운 대회전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고려군의 참패였다.], 3차 20만명[* [[귀주대첩]]에 동원된 병력이다. 고려군 20만명과 거란군 10만명이 격돌해 도합 30만 대군이 싸운 회전이었다. 이 전투는 고려군이 승리했다.] * [[여진정벌]]: 본대 [[별무반]] 17만명 * [[거란 유민들의 고려 침공]]: 1차: 1만5천여명 * [[삼별초의 난]]: 1만명(정부군) *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1차 1만4천7백명, 2차 2만7천명 * [[홍건적의 난]]: 제1차 2만명, 제2차 20만명 * [[제1차 요동정벌]]: 오녀산성 공격 1만 5천여 명 * [[목호의 난]]: 25,605명 * [[제2차 요동정벌]]: 5만명(전투병 3만8천명), 군마 2만필 * 해군 * [[정종(고려 10대)|정종]] 시기에 예성강의 함선 180척으로 군수 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 [[삼별초의 난]] 시기에 [[삼별초]]가 강화도에서 진도로 이동하며 징발한 함선은 1천여척이나 되었다. 정부군이 탐라정벌을 위해 동원한 함선은 160척이다. * [[원나라의 일본원정]]의 시기에 고려수군은 함선 900척[* 300척은 전선, 300척은 상륙을 위한 소형선, 300척은 물을 나르기 위한 급수선이다.]을 동원하였다. 이 많은 함선을 고작 4개월 동안 3만 5천 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제작하였다. * 1366년 전라도도순문사 김유는 전선 100척으로 탐라의 목호를 정벌하려하였고 1374년 [[목호의 난]] 정벌시에는 병선 314척을 동원하였다. * 이작도해전에 고려 해군은 전선 80척을 동원하였다. * [[정지]]의 [[관음포 해전]]에 고려해군은 전선 47척을 동원하였다. * [[최무선]]의 [[진포해전]]에 고려해군은 전선 100여척을 동원하였다. * [[대마도 정벌#s-3|제1차 대마도 정벌]]에 전선 100척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병력동원이 얼마간의 과장이 섞였음을 고려하더라도 고려는 때때로 상당한 규모의 대군을 동원하였는데 이런 대규모 병력 동원은 고려가 중앙집권제가 아니라 지방분권제에 가까웠던 덕분에 가능했다. 이런 정치 구조는 조선과 고려의 근본적인 차이점이었다. 고려의 지방은 향리에 의해 지배되었다. 개국 초의 소위 호족이란 집단에서 분화한 이들은 고려 조정에 세금만 올려보내면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으며 촌락별, 읍별 방위체계를 총괄하였다. 그래서 고려의 지방은 독자적으로 병력을 양성하고 운용할 수 있었다. 특히 양계(북계, 동계) 지역은 사실상 전 남성인구가 현역/예비역 군인이고 모든 마을과 촌락이 요새화되어 있었다.[* 고려시대 수묵화인 독화로사도나 고려도경 등에 단편적으로 남은 기록을 검토해보면 고려시대의 촌락은 평지가 아닌 산이나 골짜기 같이 방어하기 편한 지형에 형성되어 있었을 확률이 높다. 조선처럼 평지에서 농사짓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군제는 지방이 중앙정부에 대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위험요소를 품고 있었다. 실제로 고려 정규군은 몽골의 침공 전에 이미 [[묘청의 난]]과 [[조위총의 난]]으로 심각한 내란에 시달렸다. 내란의 여파가 워낙 심해서 여몽전쟁 때 제대로 된 전쟁 수행도 힘들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조휘, 탁청, 이안사처럼 적국과 기득권을 보장받으려는 지방세력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 지방이 배신할 위험도 컸다. 좋은 예로 여요전쟁때는 강조가 패했을때 현종이 수도를 버리고 소수의 인원만으로 파천하는데 지방에선 지원군을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 게다가 대군을 동원하고 나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각기 다른 집단에 속한 무장집단을 긁어모은 형태이다보니 일률적인 지휘가 쉽지 않았다. 상장군과 대장군들의 합좌기관이었던 중방에서 하듯이 야전에 나서서도 지방군대의 사령관들과 합의를 해서 가장 좋은 해결책을 끌어내야할 책임이 총사령관에게 주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총사령관과 사령관들 간의 합의가 실패하거나 사령관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는것이다. 1차 여몽전쟁때의 안북성 전투는 대표적인 합의 실패사례인데 흔히 딸이 최우와 재혼한 대집성이 자신의 뒷배로 다른 지휘관들을 찍어눌러 성밖에 나가싸우려다 패한 전투로 알려져 있지만 최우 덕을 본 부분은 패전 후 처벌을 받지 않은 부분이다. 대집성이 최우의 권위를 내세워 다른 지휘관들을 찍어 눌렀다면 전투 당일 다른 진주와 지병마사가 성안에서 움직이지 않고 대집성 혼자 나가게 놔둔 점이나 [[채송년]]을 비롯해 살아남은 지휘관들이 별다른 문책 없이 넘어간 점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물론 고려의 군제에는 이렇게 문제가 많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장점도 많았다. 우선, 중앙과 지방의 공조가 원활하기만 하면 병력 동원에는 오히려 유리했다. 중앙정부가 무리해서 행정력이나 재정을 낭비하지 않고도 지방으로부터 병력을 제공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방의 방위체계에도 제법 도움이 되었다. 지방이 상당한 자율권을 가지고 있어서 외침에 한결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고려가 조선보다 부족한 인구와 생산력으로도 외적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울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이자겸의 난-묘청의 난-조위총의 난을 거치며 고려군은 주력군이 대거 소모된 상태에서 1차 여몽전쟁을 맞아 개경의 중앙군이 괴멸되고, 북계는 적을 막고 군사를 징발하는 체계 자체가 소멸되었기에 이어진 전쟁에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이어진 전쟁으로 주현군까지 차례차례 각개격파 당하며 고려군의 영광은 막을 내린다. 단순히 병력만 소모된게 아니라 전시과로 대표되는 기존 경제 체제 자체가 무너진터라 중기 이후론 말그대로 동원이 필요하면 나라를 거덜내고 백성의 피고름을 쥐어짜 군대를 유지하는 방식이 이어졌고 말기엔 상설화된 원수직이 제각기 특정 지방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지방의 군대가 군벌화되기 시작한다.[[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ttwar&no=903194&search_head=70&page=1|#]]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만력제, version=706, paragraph=5.2)]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