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군 (문단 편집) ===== 중앙군의 구성에 관하여 ===== 일반적으로 왕조 국가 시대의 중앙군 소속의 군인들은, 복무 방식에 따라 두 가지 부류로 구분된다. 1. 중세기사처럼 세습적으로 군인 신분이 유지되는 방식. 2. 평상시는 농민이었다가, 순서가 되면 정해진 연수만큼 복무하는 방식. 1번의 경우 세습적으로 군인을 하는 직업군인들이 월급을 받으면 수도에서 근무하는 경우이며, 2번의 경우 평상시에 농사를 짓던 일반 농민이, 때가 되면 군역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수도로 오는 경우이다. 때문에, 항상 개경에 거주할 필요가 없고, 군역의 의무를 수행할때만 거주장소와 월급을 주면 된다. 고려의 중앙군은 1, 2번 모두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2개 다 사료에 등장한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1번을 군반씨족제설, 2번을 부병제설 이라고 통칭한다. 먼저,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등장한다. >(문종18년) 병부에서 아뢰기를, 군반씨족의 장적(帳籍)이 작성한 지 오래되어 낡고 썩었습니다. 때문에 군인의 수효(軍額)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이전의 방식에 의거해 그 장적을 다시 만들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그 청을 받아들였다 >---- >《고려사》권 8, 세가8, 문종 5년 윤 5월 여기서 '군반씨족의 장적'은 누가봐도 군반씨족을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두 가지 문제점이 존재한다. 1.최소 4만 5천 명(2군 6위의 서류상 총원수)이나 되는 군인들이 개경에 모두 거주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고려 개경의 평상시 인구가 약 30만~50만호로 추정되는데, 이 군인들의 가족까지 쳐서 숫자를 계산하면 말도 안되는 수치가 나온다. 2.월급이 너무 많다. 보통 군인들에게 월급으로 땅 20결을 주었는데, 4만 5천명에게 준다고 하면 90만결이 된다. 근데, 고려말인 공양왕 대에 한 토지조사 결과가 79만 8천 118결이었으므로,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북한|개경 인구의 최소 절반이상은 군인이었고 고려 정부 예산의 90%이상이 군인월급으로 지급되었다는 소리가 된다.]]''' 다음으로 부병제설의 사료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는 삼한을 통일하고 비로소 6위를 두었는데, 위에는 38領이 있고,領에는 각기 천 명씩이 있으며, 상하가 서로 유지되고 >체통이 서로 연속하니, 당의 부위제도를 방불하였던 것이다 >---- >《고려사》권 81, 志35, 兵1, 序 >(고려는)나라 안에 개인 사유지(私田)는 없다. 백성은 가족수에 따라 役을 부과받으며 16세가 넘으면 군역에 충당된다. 6군3위는 >항상 관부에 머물러 있다. 3년마다 선발되어 서북의 국경지대를 파수하는 군인들은 반년마다 교대된다. 군인들은 비상시에는 >무장을 하고 役事가 있을 때에는 징발된다. 일이 끝나면 농사처로 돌아간다 >---- >《宋史》권 487, 列傳246, 外國3, 高麗 >(문종) 4년 10월 도병마사왕총지가 상주(上奏)하였다. 傳에 이르기를 안전할 때에도 위태로운 때를 잊어서는 안된다고 했고 또 >이르기를 적이 오지 않는다 하여방비를 소홀히 해서는 안된다 하였습니다. 하물며 諸衛의 군사들은 국가의 爪牙이니 마땅히 >농한기에는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 >(《高麗史》권 81, 志35, 兵1, 兵制문종 4년 10월). >(고종 4년 10월) 安東慶州晋陜州尙州靈岩羅州全州楊廣州淸州忠州등 10道에 사신을 파견하여 諸州의 土貢을 독촉하고 또 >겨울옷을 가지고 오겠다는 이유로 귀향했다가 오랫 동안 번상(番上)하지 않는 군인들에게 빨리 서울로 올라오도록 명령하였다 >---- >《高麗史》권 22, 世家22, 고종 4년 10월). 그러나 부병제설에도 비슷한 문제점이 있는데, 먼저 부병제설에서는 군역을 수행하는 농민에게 군반씨족제설처럼 땅을 주진 않지만 대신 농민이 본래 가지고 있던 땅에 대해 면세권을 준다. 고로 중앙에서 복무하는 농민, 군역을 하는 대신 세금을 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면세지를 줘도 똑같이 90만결을 줘야 한다는 군반설과 비슷한 문제점에 봉착하게 된다''' 이렇게 두 설이 대립하던 중 결국 --여느 고려 관련 학설이 그러하듯-- 둘을 합쳤고, 고려 중앙군은 월급을 받는 세습제 직업 군인 + 때가 되면 중앙으로 올라와 근무하는 농민으로 구성되었다는 군반씨족제설 + 부병제설 = 경외군 혼성제설이 탄생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실제로 이렇게 하자 상당수의 문제점들이 해결되었고, 이렇게 경외군 혼성제설이 자리를 잡는듯 했으나... 중요한건 '''사료가 없다.''' 즉, '''상상력이 사료를 이기게 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