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군 (문단 편집) === 중기와 후기 === 그러나 [[무신정변]]으로 전기 고려군의 체제가 모두 무너지기 시작한다. 무신정변자들끼리의 소모정쟁과 여러가지 반란들을 진압하면서 중앙군 편제나 지방군 편제는 점점 축소 유명무실화되어갔고 무신 집권자들의 사병기구인 도방(都房)이나 [[삼별초]](三別抄)와 같은 사병 집단들에 의해서 명부상의 편제 조직이나 형식적인 존재로 전락하게 되게 된다. 당장 친위대인 공학군/견룡군/순검군조차도 점점 수가 줄어들어 [[명종(고려)|명종]]때 편성된것으로 보이는 위국초맹반(衛國抄猛班)[* 별무반이라는 표현에서도 있듯이 고려군에서 반(班)이라는 편제는 특수목적으로 만든 편제 단위라고 할 수 있다.]이라는 맹군(猛軍) 소속의 병력들로 재편성을 해서 2군 6위의 업무를 할 정도였는데 이들 규모가 고작 400여명에 불과했다.[* 다른 호위반들인 견룡반, 중금반, 도지반, 백갑반들도 있었지만 실질적인 호위군 전력은 위국맹초반이 중심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최씨 정권|최씨무신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실상 편제는 형식만 남고 사문화되었고 그저 관직명에서만 찾아 볼 수 있는 관직 자리에 불과한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게 되었고 앞서 언급된 도방(都房)이나 [[삼별초]](三別抄)같은 무신집권자들의 사병집단이 이들 편제를 흡수하면서 정식 중앙군으로 체제가 전환되며 정규군 노릇을 했다. 그로 인하여 [[고려]]의 [[여몽전쟁|대몽항쟁]]은 제대로된 조직적인 저항과 이전의 [[여요전쟁]]이나 [[고려의 여진 정벌|여진정벌전]]과 같은 대규모 정규군이 동원되는 일은 거의 없다시피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 중앙군이 이런 상황이니 지방군인 주진군-주현군의 전투병력 핵심인 보승(保勝)·정용(精勇)의 보병-기병도 규모가 축소된다. 특히 보병에 비견되는 보승은 노역부대인 1~3품군과 차이가 없어질 정도였다. [[여몽전쟁|대몽항쟁]] 이후에는 [[원 간섭기|원의 간섭]]으로 인하여 아예 대규모 정규군은 보유가 사실상 금지당하면서 2군 6위체제의 부활이나 군제개편은 꿈도 꿀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원종(고려)|원종]]기인 무신정권 말기에 중앙군으로는 친위대인 후벽(後壁)이 존재했으며 이들 수장을 무신관료로 후벽장군(後壁將軍)이 맡았다.[* 귀족자제들인 세가의 제자들이 맡았다고 한다.] 동시에 [[삼별초의 난]]으로 인하여 고려는 처음부터 군사제도를 재정비해야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원의 간섭과 통제에 의하여 겨우 재편 할 수 있었던 군사제도는 임금의 친위부대인 홀치(忽赤)[* [[충렬왕]]이 [[원종(고려)|원종]] 15년에 [[원나라|원]]에 볼모로 다녀온 의관 자제를 모아서 만들었으며 편제로는 홀치청(忽赤廳)을 중심으로 임금의 호위를 맡은 군사는 대전홀치(大殿忽赤), 세자의 호위를 담당한 자는 세자부홀치(世子府忽赤)로 구성되었으며 초기에는 4번(番)으로 구성했다가 원종 16년에 3번으로 다시 축소개편후 충렬왕 즉위후에는 4번 체제를 유지하게 된다.]와 용호군이 재조직된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충선왕]]기에 용호를 호분(虎賁)으로 고쳤는데, 그 후 친어군(親禦軍)으로 고쳤고 그 후에 또 다시 용호군 편제를 구성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후술될 것처럼 이 용호군은 원 만호부의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 홀치를 중심으로 몽골식 관제의 영향을 받은 [[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A%B0%EB%8B%A4%EC%B9%98(%E4%BA%90%E5%A4%9A%E8%B5%A4)|우다치(亐多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1697|조라치(詔羅赤)]]/[[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B%82%B4%EC%86%8D%EA%B3%A0%EC%B9%98(%E5%85%A7%E9%80%9F%E5%8F%A4%E8%B5%A4)|내속고치(內速古赤)]]/[[http://thesaurus.history.go.kr/TermInfo.jsp?from=TermInfo&SearchString=%C3%83%C2%AB%C3%82%C2%AC%C3%82%C2%B8%C3%83%C2%AC%C3%82%C2%84%C3%82%C2%9C%C3%83%C2%AD%C3%82%C2%96%C3%82%C2%89%C3%83%C2%AC%C3%82%C2%A0%C3%82%C2%95&term_id=21019264|팔가치(八加赤)]]/[[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2112|겁설(怯薛)&겁설관(怯薛官)]]/[[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9583|파오치(波吾赤)]]라는 고려왕 직속의 숙위군 및 중앙군이 미약하게나마 존재했으나 당연하게 몽골의 만호부의 통제를 받았으며 지방군으로는 농민들을 강제징집한 익군(翼軍) 밖에 없었고 이는 [[카다안의 침입]]에서 고려군이 제대로된 전력을 대응하지 못하고 [[원나라|원]]에 군사를 청하는 등의 군사력이 사실상 없는 수준으로 심하게 쪼그라들게 된다. 더 심각한 것은 군사훈련조차도 [[원나라|원]]의 통제를 받아야했기에 사실상 할 수 없었다. 당시 그나마 남아있는 고려 중앙군 혹은 관군을 통제할 목적으로 [[원나라|원]]은 만호부(萬戶府)를 설치하고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의 병관(兵官)들이 존재하거나 몽골군 편제에 소속되는 형태였기에 위에 언급된 고려 왕실 직속의 중앙군들은 정말 소수의 호위-숙위 병력들이고 그 대부분은 이러한 [[원나라|원]]의 만호부나 정동행성과 같은 원나라의 고려통제목적의 관청에서 통제 받았다.[* 이때문에 권문세족과 같은 친원파들이 중앙군 병력을 이용해서 왕권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며 아래 언급되는 공민왕기에 여러차례 반란과 친원파 숙청등을 통하여 이 문제가 개선된다.] 익군이 고려 정규군으로서의 그 명맥을 이어가는 형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렇게 허약해진 국방력은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라는 사태에도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망가진 고려군은 고려 말기 [[공민왕]] 시기에 반원정책과 더불어 기존의 [[원나라]]식 중앙군 제도를 전면개편하게 되며 충용위(忠勇尉) / 근시위(近侍尉) / 별보위(別保尉) / 자제위(子弟衛) 4위가 친위대겸 중앙군으로서의 역할 기능했다. 이 총 4위에는 장군(將軍), 중랑장(中郞將), 낭장(郞將), 별장(別將), 산원(散員), 위장(尉長), 대장(隊長) 직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는 고려가 한참 쇠퇴할 때라서 고려 전기와 같은 전면전이 가능한 체계적인 중앙군과 지방군 제도는 완전히 부활하지는 못했다. 중앙군이 4위체제로 부활을 했으나 결국 전면전을 치루기에는 한없이 부족한 전력이었고 그나마 중앙군 규모만 겨우 왕실 및 도성방어만 겨우 가능한 수준으로 확대된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공양왕]] 대까지는 최영과 이성계를 포함한 신흥 무인 세력의 [[사병#s-2|사병]][* 대표적인게 이성계의 사병인 [[가별초]]가 있다.]과 다를 바 없는 징병군인 익군(농민군)이 정규군 역할을 했다. 그 외 훗날 [[의금부]]로 이어지는 [[순군만호부]] 또한 존속하며 헌병군 역할을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