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장 (문단 편집) == 설명 == 중국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보이며 불경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연(棄老國緣)조의 설화'에서 기로국이 고려로 와전된 이야기가 고려장 설화의 원형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장이라는 단어 자체는 고려의 무덤 등의 뜻으로 쓰인 적이 있으며, 현대 한국인들의 인식과 달리 일본에 의해 창작되고 명명된 것이 아니다. '''처음으로 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늙은이를 버리는 풍속'을 뜻하는 낱말로 사용되었던 기록'''은 1882년도에 발간된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의 책,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다. ||(조선 왕조)이전까지는 일본에서도 오래전부터 유행하여 17세기에 이르기까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풍속이 한국에 성행하고 있었다. 고려장은 그 자세한 내용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버리는 풍속이었다.(Heretofore the same rites which were so long in vogue in Japan, traces of which were noticed even down to the seventeenth century, held unchallenged sway in Corea. Ko-rai-chang, though not fully known in its details, was the habit of burying old men alive.)||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한국을 실제로 여행했던 영국의 여류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이 쓰고 1897년 출간 된 그녀의 책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가 있다. 이사벨라가 원산에서 6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고대 무덤들을 방문했을 때 고려장을 연상케 하는 전설을 들은 내용이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https://ia802608.us.archive.org/15/items/koreaherneighbor00bird/koreaherneighbor00bird.pdf|참고]] ||이전 왕조, 즉 5백년 이상 거슬러 올라가면 늙은이나 병자가 가족들에게 짐이 될 경우 이 고분들에 딸린 돌방에 약간의 음식과 물을 남겨둔 채로 유폐시키고는 거기에서 죽게 내버려 두는 일이 관습적으로 행해졌다고 한다.(During the last dynasty, and more than five centuries ago, it was customary, when people from age and infirmity became burdensome to their relations, to incarcerate them in the stone cells which these mounds contain, with a little food and water, and leave them there to die.)|| 일제강점기 일본제국 측에서 펴낸 자료를 통해 확인해 보면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것으로 1919년에 발행된 <전설의 조선>이라는 책이 가장 먼저 나온다. 다만 이것이 고려장 설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최초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일단 현재까지 드러난 것으로는 그 시기가 제일 빠르다. 이 책의 지은이는 평양고등보통학교 교유인 미와 타마키(三輪環)로 표시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그가 조선에서 채집한 설화들을 엮은 조선의 구비전설(口碑傳說) 단원 말미에 동화 파트가 들어 있고, 해당 동화들 가운데 '불효식자(不孝息子)'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 내용은 "늙은 제 아비를 지게에다 지고 산 속에 버리려는 어떤 사내가 산에서 내려오던 길에 아들보고 그 지게가 필요 없으니 버리라고 하자, 그 아들이 하는 말이 나중에 아버지도 늙으면 필요할 텐데 또 써야 하니까 버리지 못한다고 하매 곧 크게 뉘우치고 버린 제 아비를 다시 모셔왔다"는 바로 그 얘기이다. 다만 설화의 내용은 고려장 설화와 동일하나 고려장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같은 내용의 이야기는 1924년에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조선동화집>에도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등장하며, 곧이어 1926년에는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정리한 <조선동화집>에도 약간 내용을 달리하여 '부모를 버린 사내'라는 제목으로 거듭 수록되어 있다. 즉, 식민통치자들이 고려장 설화를 날조하여 널리 퍼트렸다는 인식과 달리 노인들의 증언이나 서양인 여행자/선교사들의 기록을 본다면 결국 조선 땅에서 실제로 존재하던 설화와 전설을 채집하여 수록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의 자료를 더 보자면 조선총독부에서 <조선동화집>을 출간하여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를 다룬 해인 1924년에 고려장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생계로 인해 부친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24년 9월 13일자 동아일보에서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후, 사위가 장인을 생매장한 사건을 다룬 1934년 6월 9일자 조선중앙일보에서도 고려장을 특정 풍속을 뜻하는 용어로 사용했다. 즉, 조선총독부에서 동화책을 펴냈던 일제강점기 무렵 당시 조선 언론인들 사이에서 고려장이 지금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사벨라 비숍 등 조선후기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고려장 설화에 대해 꽤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고,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경험한 사람들은 대개 고려장 이야기를 알고 있으며 자기 동네에 고려장했던 곳이라는 전설이 내려오는 바위나 굴이 있었다는 기억까지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적어도 1800년대 후반에는 고려장=노인을 산에 버린다는 지금과 정확히 같은 용법으로 사용되고 있었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의 동화를 모은 조선 동화집같은 책을 보면 실제 여부와 상관없이 민간에서 구전될 정도로 이야기가 널리 보급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종합하면 고려장 설화는 이미 일제강점기 이전부터 구전 설화로서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총독부에서 처음으로 고려장 설화의 내용이 담긴 동화책을 펴낼 무렵인 1920년대의 조선의 언론인들은 고려장이라는 용어를 지금과 같은 의미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이를 고려 시대 때 실제 있었던 장례 풍습이라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고 오해하게 된 것은 대략 19세기 말~20세기 초 무렵으로 추정된다. 구한말 외국인들의 기록이나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어린시절을 보낸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설화라면, 최소한 일제강점기보다는 이전에 생긴 것이 분명하다. 설화나 전설은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닌 세월을 거쳐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화, 전설이 생각보다 그리 긴 역사를 지니지 않는 경우가 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고 여겨지는 킬트도 알고보면 그리 오랜 전통이 아니다. 또한 18세기까지의 문헌들에는 고려장 설화와 관련된 내용들을 찾을 수 없다. 때문에 이런 고려장 설화는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의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세도정치 시기 민에 대한 관의 가혹한 수탈이 이뤄지고 여러 재해와 환란이 발생하여 곤궁함과 고통을 이기지 못하여 고향과 가족을 버리고 떠난 이들이 큰 문제가 되었다. 동시에 서당 교육이 좀 더 널리 이뤄지고 여러 공연과 이야기들이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민의 문화적 수준이 높아졌고, 서학과 동학을 접하며 민의 자기 정체성 자각이 이뤄짐에 따라 19세기 세도정치 시기에 여러 종류의 창작 설화들이 등장하였다. 따라서 이런 시대적 배경 위에서 불경과 효자전에 나온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민중 설화로 추정하는 게 가장 합리적인 설명일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