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청자 (문단 편집) == 쇠퇴 이유 == 조선시대때에 청자는 점차 유행에 뒤처지면서 새로 유행하기 시작한 [[분청사기]]를 거쳐 [[조선백자|백자]]에게 자리를 내줬다. 그래도 [[17세기]] 말엽까지는 [[조선청자]]로 불리면서 제작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다 조선 후기에 가서는 청자 제조의 기술은 거의 실전되고, [[대한제국]] 시대에 가서는 청자의 존재가 거의 잊혀지게 되었다. 이를 찾은 것은 바로 [[일본 제국|일제]]인데, [[도굴꾼|고려 왕족이나 귀족의 무덤을 파다가]] 청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이미 [[구한말]] 때부터 고려 무덤에 대한 도굴이 기승을 부렸다고. [[이토 히로부미]]가 청자 수집에 앞장선 대표적인 인물로 희한하게도 [[덕수궁]] 박물관에도 가져다놓았다고 한다. [[고종(대한제국)|고종]]이 청자를 보고 어디서 나온 거냐고 묻자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의 도자기라고 대답했고, 고종은 "우리나라에는 이런 거 없다."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_id=201211282124095|#]] 항목의 맨 위에 언급한 청자상감운학문매병도 [[강화도]]의 왕릉 혹은 귀족 무덤에서 일본인 도굴꾼이 파낸 물건이라고 한다. 실제로 현재도 강화도에서 고려의 30여개의 이궁과 궁궐중 단 4군데밖에 발굴이 안되었으니 앞으로 더 많은 청자가 발굴될 가능성이 있다. 흔히 [[귀족]]의 그릇이 청자고 [[서민]]의 그릇이 백자라는 오해가 있는데 사실과 다르다.[* 서민들도 '녹청자'라는 보급형 청자를 즐겨 썼다.] 백자가 청자보다 인기 있게 된 이유는 교과서에서 나오듯이 단아한 아름다움, 우아함, 청백의 순수함 등 고고한 취향에 맞는다는 이유가 크다.[* 미적 기준은 주관적인 것이다.관상용 자기는 금박에 검정색을 입힌 것부터 형형색색의 성운을 표현한 느낌까지 장르나 종류도 대단히 다양하다.흰색에 매료됐다기보다는 음식물을 보관하는 본질적 연관성과 식욕과 색상학과의 연관에서 사용자의 선택과 도태의 문제로 봐야한다. ex)식욕을 떨어뜨리는 색=파란계열색/편의점의 도시락통이나 라면 용기는 검정이나 흰색이나 채도가 낮은색계열이다. 주황색에서 붉은색까지는 식욕을 돋구는 색으로 정의하고 있다.] 청자→백자로의 이행은 중국에서는 [[원나라]] 시기를 전후로 이루어졌고 [[서양]], [[중동]], [[중앙아시아]]에서도 문화적으로 [[백색]]을 더 선호했다. [[몽골]]이나 [[중앙아시아]]의 경우는 [[백색]]을 [[태양]]의 색으로 여겨 신성시하는 풍습이 있었고[* [[한민족]]도 이와 비슷하게 오랜 옛날부터 [[백의민족]] 사례와 같이 흰색을 숭상해온 이유가 이것이다. [[순우리말]]로 '해(日)'와 '흰(白)'은 어원이 같다고 한다.] 이는 백자로 전환된 이유에 대한 온갖 추측 중 하나이다. 지금도 전 세계 [[레스토랑]]에서 청자와 백자 어느 것을 더 많이 사용하는지, 본차이나 등 [[유럽]] 명품 도자기들이 청자인지 백자인지를 생각해 본다면 답이 나온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조선시대 초기까지 청자를 만드려고 애쓴 기록들이 있다. 청자에서 백자로 바뀐 것은 단아한 아름다움과 우아함이 고고한 취향에 맞는다기보다는, 수천 년 중국 도자 역사에서 당대 취향이 백자로 전환되었을 뿐이라거나, 원나라 특유의 [[유목민]] 전통에서 비롯되었다는 등이 있지만 그저 수많은 설 중 하나일 뿐이다. 원나라 이전까지 청자가 백자보다 더 유행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까지 기술 부족으로 백자에서 완전한 백색을 구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중금에서 고려청자와 함께 천하제일로 거론하는 정요 백자를 보면 알겠지만 완전한 백색을 구현하지 못하고 칙칙해서 백색이라기보다는 --회색--상아색에 더 가깝다.[* 이는 정요백자가 산화번조로 구워졌기 때문에 흙과 유약 속의 미세한 철분이 산화되어 생기는 현상이다. 원대 경덕진요의 초기백자역시 원료의 미세철분 조정이 (비교적)미숙하여 새하얀 백자가 아니라 청백자가 생산되었다.] 이런 백자의 기술 부족이 해결된 시대가 원나라 후기로 백자에서 완전한 백색이 구현되자 청자가 밀려나고 도자기의 대세를 백자가 차지하게 된다. 게다가 기술적으로 보면 청자보다 백자를 만들기가 더 어렵다. 청자는 유약의 혼합으로 전체적으로 청색을 냄으로써 무늬를 넣을 수 있지만, 백자는 바탕이 하얗기 때문에 희귀 원료가 많이 필요하다. 대표적인 것이 백자에 파란 무늬를 넣는 코발트 안료다. 백자에 많이 사용되는 코발트는 이란에서 산출되는 것으로, 고문헌에는 회청(回靑, 혹은 회회청回回靑)이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무역으로 확보할 수밖에 없었던 귀한 안료였다. 이를 대체하고자 조선 세조 때부터 국산 청화안료인 [[토청]](土靑)을 개발하고 사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만, 토청은 회청처럼 선명한 푸른빛이 나오는 게 아니라 검푸른 색이 나온다.([[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9b0900a&q=%EB%B0%B1%EC%9E%90%EC%B2%AD%ED%99%94%EB%A7%A4%EC%A3%BD%EB%AC%B8%EB%B3%91|참조]]) 백자를 만들 수 있는 온도인 섭씨 1,200도[* 백자는 태토와 유약의 조합에 따라 구워지는 온도가 다양한데 일반적으로 전통적인 백자라 하면 1200~1300도 사이에서 구워졌다. ]이상에서도 온전히 버틸 수 있는 안료가 코발트뿐이기 때문이다. 생물 안료는 수백 도도 버티지 못하고, 다른 광물안료들도 고온을 버티지 못해 변색되거나 흐릿해지기 십상이다. 그 문양 때문에 가치를 인정받은 것이다. 대신 조선 후기에는 대체 염료로 인해 청화백자 수가 늘어난다. [[토청]]도 비록 색이 좋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대체재로 활용되었고, 18~19세기 들어 서양산인 값싼 양청(洋靑)이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값이 확 떨어진다. 양청은 [[단청]]에도 쓰일 정도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만드는 것이 더 어렵고 복잡할수록 가격이 높아지고, 가격이 높아지는 것은 사치품으로서는 단점이 아니라 장점이다. 현대에도 명품 백이나 명품 시계 등은 이 핑계 저 핑계 대서 가격을 일부러 높여 받는 것을 생각하자. 현실적으로 당시 서민들은 목기나 도기를 주로 사용했다 한다. 고려청자가 [[조선백자]]에 비해서 대체로 무늬와 형상이 정교하고 화려한 것은 사실이다. 조선은 왕도정치를 표방하고 사치를 멀리하는 검약 정신을 강조하였기에 고려의 귀족 문화와 같은 화려함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청자뿐만이 아니라 많은 문화 영역에서 조선은 고려보다 검소함을 지향한 부분이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