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분문화 (문단 편집) ==== 신라의 고총 고분군 ==== [include(틀:신라의 고총 고분군)] 신라의 5~6세기 성장~~이라쓰고 멀티 확장이라 읽는~~ 과정을 보여주는 고총 고분군. 토기의 양식적 통일성, 신라에 의한 위세품 사여체계, 그리고 고총 고분군의 형성이라는 5~6세기대 신라고고학의 [[삼위일체 #s-3|3요소]] 중 하나. [[파일:이희준2000읍락구조.jpg|width=400%align=right]] 위의 도면[* 이희준, 2000, 삼한 소국 형성 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틀 -취락 분포 정형을 중심으로-, 한국고고학보43, 한국고고학회. p.130 <그림 5>에서 인용. 물론 저 도면은 원삼국시대의 성장과정을 설명하는 도면이지만 삼국시대에도 똑같이 적용이 가능하다.]과 같이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경우에는 위의 도면처럼 고분군들이 형성되어 있다. 삼국시대를 포함한 동아시아 고대의 고분문화의 특질은 "위신(威信)의 표상"에 있다. 즉 고분을 크게 지음으로써 후대인들로 하여금 보이게 하였고 취락의 인근에 고분군[* 신라 권역에서는 [[경산시|경산]] [[임당동 고분군]], [[대구광역시|대구]] [[불로동 고분군]]과 봉무동 고분군, [[대구광역시|대구]] [[구암동 고분군]], 가야 권역에서는 [[고령군|고령]] [[지산동 고분군]], [[김해시|김해]] [[대성동 고분군]]과 봉황대 유적 등 무수히 많다. [[서울특별시|서울]] [[석촌동 고분군]]이나 [[중국]] [[길림성]] 집안시 [[통구 고분군]] 또한 마찬가지. 가장 대표적인건 역시 [[경주시|경주]] [[대릉원]]이다.]이 형성되었다.[* 물론 [[백제]]는 고분 자체는 그리 크지는 않다. [[백제]]의 고분문화는 [[마한]]으로 점철되는 전남 지역의 문화랑은 다소 달랐다.]] 즉, 지금의 남아있는 고분군의 존재만으로도 취락이 상정되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저 도면에서 대촌(大村)에 해당하는 표지적(標識的)인 존재가 바로 '''고총(古塚)[* 사실상 의미는 高塚이랑 상통한다고 보면 된다.]'''이다. 신라 고고학 연구자들은 20m 이상의 지름을 갖는 고분(古墳)을 통상 고총이라고 한다.[* 신라고고학에서만 이 정의가 통한다. 큰 고분을 고총이라고 하는 것은 같지만 다른 [[백제]]나 [[고구려]], [[마한]], [[가야|여러 가야]]들, [[발해]] 등의 연구에서는 20m라는 기준이 딱히 정해진 것이 아니다.] 보통 고총을 중심으로 권역이 형성되있다. 권역의 설정은 "__같은 양식의 토기 유물군__"을 공유하고 "__같은 묘제와 분제__"를 공유하는 하위 고분군들의 분포 범위에 따라서 설정된다. 그리고 통상 그 분포 범위는 분지같은 수계망을 따라서 형성된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이런 문화적 권역을 따라서 그 권역에 대한 이름을 부여한다.][* 위의 틀처럼 지금은 통합된 [[현풍읍|현풍]]이라던지 [[달성군|달성]] 등의 통합된 군 및 읍, 면을 사용해서 부르는 것이 관용적이다. 지금의 행정구역 역시 어느 정도는 자연지리에 맞지만 완전히 자연지리를 고려한 것은 아니다.] 이렇게 신라고고학에서 형성된 권역들은 위의 표의 구분과 같다. 물론 각 권역마다도 약간씩의 차이가 있다. [[사로국]]에서 출발하는 신라도 4세기 전엽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황성동(경주)|경주 시내 북쪽 권역인 황성동 일대]]와 --앞마당-- [[건천읍|건천 분지]], [[안강읍|안강 분지]][* 여긴 경주보다 포항이 더 가깝다.]] 남산의 끝자락인 조양동 일대를 중심으로 성장하다가 4세기 이후부터는 --9시멀티-- 경산과 영천, --5시멀티-- 울산, --1시 멀티-- 포항과 울진[* 의외로 동해안 권역으로의 진출이 빠른 편이다. 영동지역의 --남북으로 직진만 가능한-- 지리적 특징으로 일찍 진출한 것으로 보인다.] 등지로 영향력을 확대[* 일찍 진출한 덕분인지 서술한 지역에서는 "지역 양식의 토기"가 없다. 지역색이 있다고 해도 거의 신라토기 표준형에 가깝다.]시켜 나가며 5세기 중후엽을 전후한 시점에는 [[경상북도]] 권역 전체에 간접지배라는 방식으로 신라의 영향권 아래에 포섭시킨다. 물론 [[경상남도]]의 낙동강 동부 권역에도 모두 영향력을 미치지만 [[부산광역시|부산]]의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의 경우에는... --크흠-- 재론의 여지가 남아 있다.[* 분명한건 복천동 고분군에서도 신라의 영향력이 진하게 나타나긴 한다. 다만 그것이 친 [[금관국|금관가야]]의 세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보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부산만 논외로 친다고 하더라도 지금의 [[양산시|양산]]까지는 신라의 예하에 두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각 권역, 즉 지역정치체 마다의 독자성이 어느 정도는 존재해 있었고 또 차등이 존재했다. 그 레벨이 높았던 지역정치체들은 [[경주시/행정 #s-2.2|건천]] [[금척리 고분군]], [[경산시|경산]] [[임당동 고분군]], [[의성군|의성]] [[금성산 고분군]], [[창녕군|창녕]] [[교동 고분군]]이 대표적이다. * 건천읍에 존재하는 금척리 고분군이야 지역정치체라고 하기엔 경주에 너무 가까운 감이 있지만 여하간 금척리 고분군의 고총들은 [[대릉원]]의 [[천마총]]만큼 크다. 발굴 성과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수준이라서 구체적인 비교는 무리가 있으나 이런 지름이 40m가 넘는 고총이 있는 고분군 자체가 있다는 점에서 금척리 고분군의 집단은 경주의 관문적 성격을 지닌 집단으로써 일찍이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금척리 고분군에 대해서는 사량부의 거점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 경산 임당 고분군은 고총 고분군일 뿐더러 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도굴로 인해서-- 발굴사업이 계속 이어져와 그 면모가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 의성 금성산 고분군[* 대리리 고분군, 탑리리 고분군, 학미리 고분군으로 명칭이 나뉘어져 있다. 최근에 금성산 고분군으로 통합되었다.]에서도 탑리리 1호분이라는 40m 급의 대형분이 발굴조사된 바 있다. 또 그 옆으로 탑리리 2, 3, 4호분 또한 약간 작지만 고총군이 형성되어 있다. 대리리 고분군에서는 3호분 및 5호분 등이 조사되었고 그 외에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8&aid=0000479473|대리리 40번대 후반 구간의 고총군]]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8&aid=0002277505|대리리 45호분]]이 조사되었다. 탑리리 1호분에서는 고구려의 금동관이 출토된 바 있으며 다른 대리리의 고총고분에서도 금공품이 세트를 갖추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의성양식토기"라는 신라양식의 아류 양식의 중심지[* 사실 이것도 아주 약간 논란이 있다. 금성산 고분군에서는 의성양식 자체의 수량이 많지 않다는 점이 의외의 함정.. 그래서 경북북부양식 토기라는 표현도 존재한다.]이다. 이 의성 및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으며 [[경상북도]]의 북부권역에서 넓게 확인된다. 즉, 유통에 있어 경주의 거점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결과로 추정된다. 여담으로 의성지역에 존재했던 [[소문국]]에 대해서는 [[화랑세기|어떤 문제의 필사본]]에서 신라의 왕후씨족은 조문국 출신이라는 기록이 있었다고 한다. * 창녕 교동 고분군.. 또한 다소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비자벌]]로써 독립적으로 존재했느냐 아니면 신라의 하위 정치체였느냐의 문제가 있다. 여튼 창녕 교동 고분군의 규모도 상술한 고분군들에 필적한다. 5세기 중~후엽에 [[금척리 고분군]]은 '''경주의 부도(副都)''', 경산 [[임당 고분군]]은 '''낙동강 중류역 진출 교두보''', 의성 [[금성산 고분군]]은 '''경북 북부권역 진출 교두보''' 정도로 요약될 수 있다. 각 교두보들은 [[대가야]]와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한강 유역]]으로의 진출 전의 내부적 정리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부산 복천동 고분군과 창녕 교동 고분군이 신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는 전제 아래에 5세기 중엽 어느 시점 이후로 [[금관국]]의 주변 집단들─복천동 고분군은 [[독로국]]이라던지..─에 대해서 신라가 스멀스멀 드리우고 있는 것이며 금관국의 활동 범위를 좁혀나가고 있는 셈이 된다. --뭐지 전부 5세기 중후엽에 귀결되는 것만 같은 느낌은-- 그 밖의 고총 고분군들은 양상이 다 비슷비슷하다. 물론 기재된 일부 고분군 가운데서는 아에 발굴이 하나도 안된 곳도 있기 때문에 거론하지 않은 고분군들도 나중엔 면모가 밝혀질 수 있다. 일부 발굴된 고총 고분군일지라도 젤 큰 고분들은 통상 발굴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