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사렴 (문단 편집) == 생애 == 고사렴의 출신지는 [[북제]]의 발해군(渤海郡) 수현(蓚縣)으로, 할아버지인 고악은 북제의 종실 일원이었다. 아버지인 고려 또한 북제의 종실로, 북제가 멸망한 뒤 양주, 초주, 광주, 조주의 자사를 역임하고 개황 연간에 죽었다. 고사렴은 대업 연간에 치례랑을 지냈는데, 당시 [[양제(수)|양제]]가 [[고구려]]를 [[고구려-수 전쟁|원정]]할 때 병부시랑 곡사정이 고구려로 망명하자, 그와 교유한 것에 연루되어 주연현(朱鳶縣) 주부로 좌천되었다. 하지만 수나라가 혼란에 빠지면서 왕명이 닿기 어려웠고, 교지 태수인 [[구화(당나라)|구화]]는 고사렴을 사법서좌로 삼았다. 618년 [[고조(당)|당고조]]가 황제로 등극한 당시, 영장진이 교지를 공격하자, 고사렴은 행군사마가 되어 영장진을 역습하여 물리친다. 이후 622년에 고사렴은 구화와 함께 당나라에 귀순한다. 황태자 [[이건성]]과 동생 [[이세민]]이 서로를 견제할 때 고사렴은 이세민을 따르며 많은 도움을 주었다. 무덕 9년([[626년]]), [[이건성]]과 [[이원길]]이 현무문을 지나려고 할 때 이세민은 현무문의 경비를 매수하고 고사렴 등을 돕게했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성문을 지나자 이세민은 황태자 이건성을 쏘아 죽였다. 이원길이 재빨리 이세민을 치려고 했으나 이세민의 측근 [[울지경덕]]에게 제거되었다. 이세민이 권력을 잡고 즉위한 뒤, 고사렴은 시중으로 임명되었고 의흥군공(義興郡公)에 봉해져 실봉 900호를 받았다. 이후 [[왕규(당나라)|왕규]]가 자신이 몰래 상주한 내용을 고사렴에게 전했지만 고사렴은 이를 알리지 않아 안주(安州) 도독으로 좌천되었고, 익주(益州) 대도독부(大都督府) 장사로 전임되었다. 631년에 입조하여 이부상서가 되었고 허국공(許國公)으로 진봉되었으며, 아들 1명을 현공으로 책봉하였다. 능연각훈신 중 6위로 선정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