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숙 (문단 편집) == 생애 == 560년 3월 21일에 난릉왕(蘭陵王)에 봉해졌고, 564년에 [[북주]]가 [[낙양]]을 공격하자 [[곡률광]], [[단소(북제)|단소]] 등과 함께 구원하러 가서 중군이 되었으며,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북주의 군영으로 돌진해 들어가서 금용성(金鏞城) 아래에 이르렀다. 성안의 병사들이 혹시 북주의 함정일까 두려워 믿지 못하자 고숙이 투구를 벗어서 얼굴을 보여주었고, 이에 노병을 내려보내 그를 구원했다. 가면을 쓰고 다녔다는 것은 야사인데, 이 투구를 벗어 얼굴을 보여주었다는 일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승리를 기려 병사들이 난릉왕 입진곡(蘭陵王入陣曲)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이 노래는 당나라 현종이 노래가 음란하다고 하여 금지하여 중국에서는 사라졌다. 이 노래가 일본으로 전파되었고, 현대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일본 식으로 어느 정도 변형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 중. 고숙의 외모가 아름다우면서도 용맹하고, 망산의 전투로 인해 위세와 명성이 크게 높아지자 [[고위]]가 고숙을 시기했다. 기록에 따르면 망산대첩때 적진으로 뛰어든 고숙에게 어찌 몸을 살피지 않느냐며 걱정하자 고숙이 '가사친절 불각수연(家事親切不覺遂然. 집안일이라 열심히 하다 보니 그렇게 깊이 들어간 줄 몰랐다)'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고숙 본인이 황족이니 나랏일이 곧 집안일이라는 것인데, 고위는 고숙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두려워해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한다. 고숙은 사주목, 청주·영주자사를 역임하고, 569년 12월 15일에 상서령이 되었다. 570년 가을 7월 3일에는 녹상서사·중령군이 되었고, 571년에는 2월 24일에 태위가 되었으며, 단소와 함께 북주의 정양을 공격했다. 이때 단소가 병에 걸린 상태라 고숙이 장사 1천여 명을 이끌고, 동남쪽 계곡 입구에 잠복했다. 공격목표인 정양성에서는 군량이 떨어지면서 양부가 남은 군사들을 인솔해 포위를 뚫고 도망치자 고숙은 숨겨뒀던 복병으로 공격해 대부분을 포로로 잡았으며, 고위의 시기로 인해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일부러 재물을 거둬들이는 등의 행동을 했다. 원래 고숙은 오이 한 쪽이 있어도 병사들과 나누어서 먹고, 황제가 첩 20명을 상으로 내리자 한 명만 받았다는 일화가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검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왕전]]이나 [[소하]]의 코스프레를 한 것이다. 그런데 주어진 상황이 달라 먹히지가 않았다. 왕전이나 소하는 황족이 아니어서 민심이 없다면 반역을 일으키기 어려운 조건이었지만 고숙은 황족으로 그것도 먼 촌수의 황족도 아니고 '''사후 황제로 추존된 [[고징]]의 넷째 아들'''이었다. 거기다 [[구국영웅]]이니 명분은 이미 차고 넘치는 상황이었다. 구체적으로 보면 고징은 동위의 승상 고환의 장남으로, 고환 사후 승상이 되어 황제 자리를 탐하다 죽고, 고환의 차남 고양이 이에 동위를 들어엎고 북제를 건국한다. 고위는 고환의 아홉째 아들 고담의 아들이니 고징의 아들인 고숙과는 사촌 형제 관계다. 고환이 건국 이후 고조로 추존되고, 고징은 그 고조의 장남으로 세종으로 추존되었으니, 고징의 아들 고숙은 순수하게 집안 내부의 종법제로 보면 고환의 장남의 아들이라, 고환의 9남의 아들이던 당시 황제 고위보다 정통성이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울상원(尉相願)으로부터 그렇게 되면 오히려 죄로 삼아 죽일 것이라 하며, 병을 핑계로 물러나야 한다는 소리를 듣는다. 고숙도 이것이 옳다고 여겼으나, 나라가 원체 위급한지라 물러나지 못했다. 이때 고숙은 얼굴에 종기가 심하게 나서 아픈 상황이었지만, 고위가 강가의 도적들을 두려워해 장군으로 임명한다. 이에 고숙은 탄식하며 "나는 수 년 간 얼굴의 종기를 앓아왔으나 어찌 이제 나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병을 고치지 않았다. 이 때는 남진이 자국의 명장 오명철을 보내 북벌을 시도하던 상황이었다. 572년 8월 1일 고숙은 대사마가 되었는데 이는 [[삼공]]의 하나로써 재상의 반열에 드는 고급 명예직이다. 그리고 고숙은 [[곡률광]]이 죽자 어쩔 수 없이 군을 지휘하게 되었다. 573년 4월 13일에는 태보가 되었으며, 진과의 싸움에서 패한 것을 구실로 [[짐새|짐주]]로 독살당했다. 이때 고숙이 짐주를 받고 한탄하자 고숙의 아내 정씨(鄭氏)가 '어찌 황상께 호소하지 않으십니까?' 라고 물었으나 고숙은 '황상의 얼굴을 무슨 이유로 보겠는가?' 라고 답하고 짐주를 마셨다. 이제 고숙이 없는 북제는 남진의 오명철에게 장강-회수 주변의 영토를 모조리 빼앗기고 만다. 오명철은 북제를 상대로는 승승장구했으나 이후 북제를 멸망시킨 북주와 맞붙게되자 국력과 인재풀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처참하게 깨진다. 사후엔 [[태위]]로 추증되었다. 그의 사후에 그의 이복동생인 [[고연종]]은 고위의 막장짓에 질린 신하들의 만장일치로 황제에 추대된다. 고숙보다 인망이 없던 고연종이 만장일치로 황제가 된 것을 보면 고숙이 찬탈을 했더라도 반발은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고연종이 패배하자 북제의 멸망은 기정사실이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