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양시/역사 (문단 편집) == [[삼국시대]] == 이때부터 [[삼국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현 고양시 지역 또한 그즈음 백제에 귀속된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불분명하다. 다만 304년 [[분서왕]] 대에 낙랑군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계속 북쪽으로 밀고 올라가려 시도했던 흔적이 보이고 327년 [[비류왕]] 대에 왕의 이복동생 내신좌평 [[우복]]이 한강 이북인 북한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이때 쯤에는 현 고양시 지역이 백제에 속하게 된 건 확실하다. 그 이후인 [[근초고왕]] 대에는 치양(현 [[황해남도]] [[배천군]]) 일대에서 고구려 [[고국원왕]]과의 [[치양 전투]]가 벌어지는 등 백제가 황해도까지 밀고 올라간 것으로 나타난다. 백제에 속하게 된 현 덕양구 지역은 '''개백현(皆伯縣)'''으로 불리게 되며 이때부터가 본격적인 지역 역사의 시작이다. 개백현의 치소는 [[행주산성]]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심 영역이 현재의 덕양구 [[행주내동]]에서 [[능곡동(고양)|능곡동]] 일대에 해당한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대대적인 남진정책으로 백제는 [[개로왕]]이 죽고 수도 [[위례성]]이 함락되는 등 달달 털리게 되는데 위례성보다 북쪽에 있었던 개백현 또한 당연히 이때 함락되었으며 개백현은 고구려가 현 [[서울특별시]] 한강 이북 일대에 설치한 북한산군(北漢山郡), 별칭 남평양(南平壤)에 속하게 된다. 또한 현 일산동/서구 지역에 '''달을성현(達乙省縣)'''이 따로 설치되었으며 굴화군(屈火郡)에 속했던 걸로 추정된다. 다만 이 달을성현은 원래 아예 따로 있던 백제의 현에다 [[덮어쓰기]]로 설치한 건지 아니면 개백현의 북부를 뚝 떼어내서 설치한 건지는 불명이다. 달을성현의 치소는 고봉산 일대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중심 영역이 현 일산동구 [[성석동]]에서 덕양구 [[관산동]] 일대에 해당한다. 광개토대왕 때 달을성현을 분리 설치하면서 일산 일대가 달을성현의 관할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안장왕의 사랑과 전쟁(...) 에피소드에서 '''달을성현의 고봉산 아래(일산동구 [[중산동(고양)|중산동]]으로 보인다.)에 살던 미녀 한씨는 [[고봉산]] 정상에 불을 피워놓고 안장왕을 기다렸다'''고 한다. 참고로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게 삼국시대의 군은 현을 거느리기는 했지만 현대의 도와 시군의 관계처럼 직접적인 수직관계는 아니었다. 고구려 [[문자명왕]] 말기에는 현 고양시 지역을 다시 백제에게 뺏긴 것으로 보인다. 그때 백제는 수도가 [[웅진성]]으로 밀려났던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흥군주 [[동성왕]]과 [[무령왕]]을 배출해 고구려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기 시작하여 한강 근처까지 다시 올라가 고구려와 공방전을 벌인다. 그리고 [[춘향전]]의 원조가 되는 [[안장왕]]과 한씨의 왕봉 설화가 이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이때 한씨가 산 정상에 봉화를 놓고 안장왕을 기다렸는데 그래서 그 산의 이름이 [[고봉산]]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안장왕과 미녀 한씨의 상봉을 기념, 개백현이 이때 왕을 맞은 곳이라 하여 왕봉현(王逢縣)으로 개명됐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개백현이 진짜 왕봉현으로 바뀌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지리지 등의 기록에서 현의 이름이 그냥 고구려 개백현으로 나온 경우가 많고 왕봉현은 그냥 개백현의 별칭이었다고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혹은 왕봉현이라 써놓고 일명 개백현이라고도 한다고 써놓기도 했다.] 혹은 그냥 개백은 훈차[* 고대 한국어로 왕을 뜻하는 '가(加, 皆)'를 '맞'이한 곳.], 왕봉은 그 뜻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아서 같은 지명의 다른 표기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개백현이나 왕봉현 둘 다 고구려의 지명이 되며 백제에서는 원래 뭐라고 불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례로 [[후삼국시대]]의 기록에서도 [[통일신라]]의 옛 지명이 아닌 [[고려]] 당대에 익숙했던 새 지명으로 덮어씌운 경우가 흔히 나타난다.[* 혹은 제3의 가능성으로 백제에서든 고구려에서든 혹은 그 이전 시대부터 그냥 쭉 지명이 개백이었는데 고구려와 백제의 치열한 분쟁을 직접 겪었던 당대인들이 지명과 당대의 어떤 실제 사건을 각색해 왕봉 설화를 각색해낸 것일 수도 있다. [[공주시]]의 경우도 애시당초 왜 곰과 관련된 지명이 붙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아무튼 곰과 관련된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553년 [[신라]] [[진흥왕]]의 영토 확장 때 [[경기도]] 일대가 신라에 점령되었는데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이때 설치된 신주(新州, 후의 [[9주 5소경]] 중 [[한주]])에 속하게 된다. 그러나 곧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밀어붙이게 되는데 개백현과 달을성현은 이때 고구려가 다시 되찾은 걸로 보인다. 또한 이전에 개백현이 속했던 북한산군을 되찾기 위해 고구려의 [[뇌음신]]이 [[북한산성 전투]]를 벌였으나 신라의 [[동타천]]이 막아낸 기록이 있다. 이후 [[당나라]]가 개입한 [[삼국통일전쟁]] 때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자 현 고양시 지역은 [[통일신라]]에 속하게 된다. 685년 [[신문왕]]은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재편하는데 이때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한산주(漢山州)에 속하게 된다. 698년 [[발해]]가 세워지고 [[남북국시대]]가 개창한다. 757년 통일신라 [[경덕왕]] 대에 행정구역이 대대적으로 정리되는데 이때 한산주에 속한 북한산군 개백현과 굴화군 달을성현은 각각 한주(漢州)에 속한 한양군(漢陽郡) '''우왕현(遇王縣)'''과 교하군(交河郡) '''고봉현(高烽縣)'''으로 개칭된다. 우왕현과 고봉현은 각각 한양군과 교하군의 영현이었다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