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우영 (문단 편집) == 생애 == 1938년([[호적]]상으로는 1939년) 만주국 봉천성 본계호(현 중화인민공화국 랴오닝성 번시시 시후구)에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 제국|일제]] 경찰간부를 지낸 고종률(高鍾律)[* ? ~ 1961년. 이명 고종률(高種律). [[평안남도]] [[순사]]로 근무하던 중 1923년 12월 31일 [[평안남도지사]]로부터 정근(精勤)증서를 수여받았다.[[http://db.history.go.kr/id/gb_1924_03_13_a34720_0090|#]] 1930년 평양경찰서 경부보, 1931년부터 1932년까지 중화경찰서 경부보, 1933년 맹산경찰서 경부보 등을 지냈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4&totalCount=4&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A%B3%A0%EC%A2%85%EB%A5%A0&brokerPagingInfo=SnUpYrZZuHIxMzHLMdPQRSi0k0mUUpCDsHuCGHyKLMNd0f0h&selectedTypes=&selectedSujectClass=&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A%B3%A0%EC%A2%85%EB%A5%A0&searchKeywordConjunction=AND|#]]]과 어머니 김신숙[* 1958년 사망.] 사이의 5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312100031|#]] 유년기인 [[일제강점기]] 당시, [[아버지]]가 [[경찰공무원|경찰]] [[간부]]였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부족한 것 없이 자랐다. 그 시절에 집에 [[자가용]]이 있고 큰 [[사냥개]]를 키웠을 정도라고 고우영이 회고한 적이 있다. [[8.15 광복]] 후 구사일생으로 월남했다. 월남 당시, 아버지의 옛 동료들이 아버지를 크게 반겼지만 [[양심]] 때문인지 경찰 간부직을 포기하고[* 사실 이때 일본 경찰 출신도 이미지 세탁하고 경찰에만 잘만 들어갔던 시대이다. [[미군정]] 시절에 [[인민위원회]]를 강제해산시키고 [[일본 제국 경찰|구 일본경찰들]]을 재채용했기 때문으로, [[야인시대]]에서 잘 묘사되며 [[대구 10.1 사건]]이 벌어진 이유도 구 일본 경찰 출신들이 다시 채용되면서 사람들에게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당시에 경찰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았다.] [[낚시]]를 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고우영은 [[한중수교]] 이후 1990년대 중국에 처음 여행을 갔을 때 만주의 [[고향]]이었던 동네를 겨우 찾아가 봤지만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서 그런지 어릴 때 다니던 학교나 옛 집이 모두 사라지는 등 옛 모습은 거의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젊을 때는 [[사냥]]을 무척 즐겼던 탓에 김왕석(1927~2017)[* 수렵소설을 주로 쓴 작가로 유명하다. 90세 나이에도 대전일보에 '수렵야화'라는 소설을 연재하다가 2017년 8월 6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작품은 10월 말에 완결했다. 작품은 2021년에 내려졌다.]의 맹수와 사냥꾼이 재간되었을 때 삽화 및 특전엽서를 그리기도 했다. 1955년, 고등학생의 신분으로 "추동성"이라는 필명으로 만화계에 데뷔. 필명은 자신이 다니던 [[고등학교]]인 [[동성고등학교]]에서 따왔다. 가끔 드물게 '추동성'이 본명이며 '고우영'이 필명이라는 식으로 서술이 된 자료가 있는데 틀린 서술이다. 당시 만화방 만화([[대본소]])가 주류가 되었던 만화 시장에서 "쥐돌이"[* 다만 쥐돌이는 딱지만화로 만화방이 생기기전에 그린 만화다.], "공주 애찌루" 등을 그렸고, 후에 전업 만화가로 데뷔하면서 심장마비로 일찍 요절한 형 고일영이 그리던 "짱구박사"를 이어받아 그리기도 했다.[* 짱구는 '''이마나 뒤통수가 남달리 크게 튀어나온 머리통''''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이 당시의 한국만화들이 그렇듯이 [[만화영화]]나 [[학습만화]]로 활발히 만들어지지 않으면서 후세에 묻힌 작품이기는 하지만, [[크레용 신짱]]이 한국에 수입되기 전에 짱구라고 하면 보통 고우영 형제의 짱구박사를 떠올리는 일이 많았다. 영화 [[바람(영화)|바람]]에서도 주인공의 별명이 짱구박사다.] 하지만 [[합동출판사]]의 [[독점]]체제가 구축되고, "[[교과서]] 같은 만화"나 그린다는 이유로 ~~고 선생님의 아-트를 몰라보고~~업계에서 쫓겨난 뒤에 약동이 시리즈의 그림작가를 맡다가 스토리 작가인 [[방영진]]의 건강이 악화되어 작품이 [[연중]]되어 연재처를 찾아 나서는등의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렇게 고생을 하다가 1972년, 일간스포츠에 연재한 [[임꺽정]]이 연재되었는데 이 작품이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본격적인 만화가로서의 행보가 시작되었다. 이 작품 연재에 [[http://www.kcomics.net/magazine/column_view.asp?CateCode=3340010&Seq=1000&Vol=67&intBnum=414_8&page=15&mode=column_photo|장기영 당시 한국일보 사장의 결정이 주효했었다.]] 당시 신문에서는 단컷만화나 [[4컷 만화]]가 주로 연재되었고 그 때문에 신문만화는 무조건 단컷 아니면 4컷이라는 고정관념이 자리잡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장기영 사장이 일본이나 [[구미]] 신문에서 연재되던 극화가 큰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간스포츠에 이와 비슷한 형식의 만화를 연재하라고 지시했었다. 그러나 당시 일간스포츠 편집국은 이에 대해 매우 반발했고, 이에 장기영 회장이 그 편집진을 해고한다고 엄포를 놓고, 김수남 당시 소년 한국 주간이 편집진을 다독여 결국 만화를 연재함으로써 수습이 되었다. 그 인연 덕분이었는지 나중에 고우영은 한국일보에서 <한국만평>을 연재하게 되었다. 이후 [[수호지]], [[삼국지]], [[열국지]], [[초한지]] 등의 고전 중국 관련 역사물과 [[가루지기전]], [[일지매]] 등 한국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를 재정립한 만화 등을 그리며 연거푸 히트를 쳤고,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가의 반열에 오른다. 1980년대 들어 그는 당대 유행하던 프로덕션식 제작공정을 거부하고 스스로 실용학습만화라든가 삽화 등 만화 외적인 활동에 몰두하다 보니 장편에서 호흡이 잘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서유기>가 대표적인 예인데, [[삼장법사]]의 탄생에 인간드라마를 할애해 최선을 다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줄거리 전개에 급급해 동력이 떨어졌다. 다만 이보다 짧은 <[[21세기]] [[아리랑]] [[놀부전|놀부뎐]]>, <가루지기> 등 한국 고전을 재해석한 작품이 더 호평을 받았다. 그 시절 많은 만화가들이 그랬듯 그 또한 [[등산]]이 취미였고 유명 [[산악인]]들과 친분도 있을 정도로 조예도 깊었다. 때문에 만화에서 등산 관련 패러디가 굉장히 많이 나온다. 대표적으로 삼국지에서 심심찮게 등장하는 [[카라비너]]. 1970년대에 [[미국]]을 여행하고 쓴 미국만유기, 84년도에 [[유럽]]을 여행하고 쓴 유럽만유기, 1995년도에 중국을 여행하고 쓴 중국만유기 3권 모두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다만 이 때 연재중이던 초한지는 작가가 '''미리 완결까지 그리고 떠나는 바람'''에 그림이 초기에 비해서는 퀄리티가 떨어진다. 당시에는 [[이메일]]이 없어서 [[팩스]]를 주로 쓰던 시절이니 어쩔수 없어도 본인도 무척 아쉬워하던 이야기. 이 작품은 고우영의 저작 중에 유일하게 만화가 아닌 일반 서적으로 출판되었으며, 사후(2007년 추모 2주기)에 '고우영의 좌충우돌 세계여행기'라는 제목으로 [[복각|복간]]되었다. 어투는 만화에서 나레이션으로 보이던 어투와 거의 같다. 1990년대 들어서 눈이 나뻐지더니만 [[실명|한 쪽 눈을 볼 수 없는 상태]]까지 되었다. 그럼에도 그 상태로도 [[안경]]을 쓰고 작품을 연재했고, 1994년에 [[십팔사략]]을 내며 대작 [[사극]]작가로 돌아왔다. 이 작품 역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청소년 추천 도서가 되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1988년부터 한국만화가협회 회장을 4년간 지냈으며, 1996년부터 2년간 [[한국일보]]에 <한국만평>을 연재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사망시까지 고우영의 작품 스타일은 '줄거리보다 교훈을 강조하는 리메이크'이자 '시대초월'인데, 1980년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이 변화된 만화 제작환경 및 독자들의 기호에 따라 잊혀진 것과 달리, 원로 만화가임에도 스스로의 본질을 발견해 스타로 다시 떠올랐다. 십팔사략 이후 [[대장암]] 진단을 받아서 건강상의 문제로 뚜렷한 행보를 보이지 못하다 2001년 [[딴지일보]] 너부리 기자의 주도로 삼국지의 무삭제 복간판을 웹상에 연재했고, 완결 후 CD롬으로 냈다. 웹연재 당시 고전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해당 작품이 지닌 특유의 해학이 [[네티즌]]들의 기호와 딱 맞아 인기를 끌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잊혀져가던 그의 작품들이 재발행되었고, 그의 이름은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된다. 참고로 미국으로 [[이민]]가 살던 딸이 미국 유명 안과 병원에서 진료하길 요청해 미국가서 수술을 받고 나서야 2000년 초반에 10년 만에 한쪽 눈 실명상태에서 회복될 수 있었다. 이 일은 고우영 본인이 알리길 싫어해 그가 사망한 다음에서야 공개된 일이다. 부천 [[한국만화박물관]]에서 2015년 그의 사망 10주기를 기념하여 이벤트를 열 당시, 10년 넘게 쓰던 안경을 전시했고 [[수술]]받아 회복되자 기뻐하던 이야기라든지 유족들의 간략한 회고를 적은 글도 전시되었었다. 이후에 굿데이에 [[여말선초|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의 [[야사(역사)|야사]]를 담은 [[수레바퀴]]를 연재하다 건강상의 사정으로 중단하기도 했다. 작가 본인은 [[조선왕조 500년]]을 자신만의 색으로 담아내겠다는 원대한 목표를 세우고 시작하였으나 실제로는 음담패설을 뒤적거리는 데에 그쳐 팬에게 안타까움을 샀다.[* 작가 스스로도 연재 도중에 '이게 아닌데'라는 식으로 자평한 내용의 컷이 있다.] 연재 초반엔 [[역성혁명]], [[1차 왕자의 난]] 등의 조선 초기 정치적 사건들을 대한민국 현대사의 [[5.16]], [[12.12]] 등과 절묘하게 엮어 가며, 권모술수가 난무하던 시대의 적나라한 인간 군상을 묵직한 톤으로 그렸으나, [[조준(조선)|조준]]이 국화라는 [[기생]]의 질투로 인해 역모죄로 모함을 당했다가 결백이 드러난다는 에피소드[* 정치적 격동기였기에 기생조차 역모죄를 이용할 줄 알았다는 코멘트가 깔려 있다.] 이후로는 슬슬 말초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당 사건 자체는 실제로 실록에 짤막하게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710028_001|기록]]되어 있다.] 내용 자체는 [[용두사미]]에 그쳤을지언정, 그가 여태껏 만화를 그려오면서 쌓은 내공만큼은 이 만화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50대 중반부터 아내 박인화(세례명은 마리아) 여사와 같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고 [[세례명]]은 [[요셉]]이였다. --불교신자가 아니었어???-- 고우영은 크로닌의 소설 <[[천국의 열쇠(소설)|천국의 열쇠]]>를 만화로 각색했고, [[천주교]] 신문인 평화신문에 [[돈키호테]]를 신부로 각색한 만화 <몬시뇰키호테>를 연재하기도 했으며 [[가톨릭출판사]]에서 1998년에 편찬한 아동용 교리 공부책 <교리책 밖의 교리 이야기>(홍문택 신부 저)의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말년에 [[창세기]]부터 [[요한묵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만화로 옮길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또한 고우영 화백은 작고하기 전에 자신의 유년기 시절 만주에서의 삶에서 현대 한국에 이르기까지 경험했던 것들을 바탕으로 일종의 자서전의 성격을 띈 작품을 하나 구상하였으나 결국 갑작스럽게 운명하면서 이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실지로 [[조선일보]]에 따르면 "내 인생과 한국만화 100년 역사를 만화로 정리하겠다."라고 제안하며 2004년에 샘플 원고 2회분을 보내왔다고 한다. 하지만 구체화 되기 전에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베이퍼웨어|계획에 멈추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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