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위 (문단 편집) === 명장 곡률광을 죽이다 === 572년, 황후 곡률씨가 딸을 낳았는데 후주 고위는 곡률광을 기쁘게 하기 위해 처음에는 아들이라고 했다가 곧 딸이라고 인정했다. 이때 곡률광은 조정 및 목제파와 권력 다툼 중이었는데 그는 조정(祖珽)을 좋아하지 않았고, 조정이 군사적인 일에 있어서 장군들의 의견을 묻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다. 한 번은 곡률광이 정부 건물에서 쉬고 있었는데 조정이 그만 지나쳐 버렸다. 사실 그는 무성제 고담 시절 옥에 갇혀 눈이 멀어 있었다. 곡률광이 화가 났다는 말을 들은 조정은 곡률광이 자기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고 곡률광의 하인에게 [[뇌물]]을 주어 곡률광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오라고 했다. > 하인 : 공이 권력을 잡고 부터 곡률광은 계속해서 탄식했고 '[[봉사]]가 권력을 잡았으니 나라가 망하겠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목제파는 곡률광의 딸을 첩으로 삼으려 했지만 곡률광이 거부했다. 더 나아가 목제파가 후주 고위에게 제2의 수도 진양의 공지를 좀 달라고 했는데 곡률광이 이 땅은 군대의 말을 먹여야 하는 땅이라고 반대했다. 결국 조정과 목제파는 둘다 곡률광을 싫어했고, 이 둘은 황제 고위까지도 곡률광을 싫어하게 만들었다. 더욱이 고위가 황후 곡률씨를 총애하지 않으면서 더 심해졌다. 이때 북주의 장수 위효관(韋孝寬) 역시 이런 의심을 부추겼는데 그는 곡률광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하며 >'''고씨 왕조가 망하고, 곡률씨 왕조가 설 것이다.''' 라는 노래를 유포시켰다. 이에 조정과 유모 육씨는 이 노래를 알려 후주 고위가 더욱 곡률광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고위는 다른 심복인 한장란(韓長鸞)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한장란은 곡률광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위는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조정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이번엔 곡률광의 부하 장교였던 봉사양(封士讓)을 꼬드겼는데 봉사양은 571년 곡률광이 군사를 이끌고 왔을 때 반란을 꾀했다고 고변했다. 후주 고위는 이번에는 이를 믿었고 곡률광에게 말을 하사한다고 속이며 그를 황궁으로 불렀다. 곡률광이 궁에 들어오자 고위는 유도지(劉桃枝)를 시켜 곡률광을 목졸라 죽이게 했고, 곡률씨 일족도 멸족시켜 버렸다. 우선 곡률광의 동생과 따르는 장군이었던 곡률선(斛律羨), 그리고 곡률광의 아이들인 곡률무도(斛律武都), 곡률세웅(斛律世雄), 곡률항가(斛律恆伽)도 죽였다. 오로지 막내 아들 곡률종(斛律鍾)만이 어렸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이때 황후 곡률씨도 폐위당하고 별궁에 유폐되었다. 573년, 곡률황후가 폐위되자 유모 육씨는 비어 있는 황후 자리에 자신의 양녀인 목씨를 밀었고, 태황태후 호씨는 자기의 조카딸 호씨를 밀었다. 태황태후는 육씨에게 선물을 주고 자기가 하자는대로 하자고 했다. 후주 고위 역시 호씨를 더 총애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씨는 조정과 협의를 해서 호씨를 황후로 삼기로 했고, 고위도 이에 동의했다. 고위는 호씨를 아주 총애했고 그에게 좋은 옷을 많이 해주었다. 육씨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황제에게 >"그렇다면 황태자의 어머니가 첩이면 되겠습니까?" 라고 했지만 고위는 호씨를 총애했으므로 그녀의 바램이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이에 육씨는 점술가를 고용해 황후 호씨에게 저주를 걸었는데 이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몇달 후 호씨는 정신 이상을 보였다. 호씨는 별 이유없이 웃거나 혼자서 중얼거렸는데 후주 고위는 이런 그녀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결국 싫어하게 되었다. 겨울, 육씨는 목씨를 치장시켜 황제에게 보여주면서 >"이래도 황후로 안 뽑으실 겁니까?" 라고 했다. 후주는 결국 목씨를 황후로 삼았는데, 그를 '우황후'라 하고 호씨를 '좌황후'라 했다. 573년, 육씨는 태황태후 호씨에게 황후 호씨가 태황태후의 명성을 더렵혔다고 말했는데, 태황태후는 화를 내며 진상 조사도 하지 않고 황후 호씨를 궁에서 내쫓았고, 고위도 그녀를 폐위시켰다. 이렇게 되자 육씨와 목제파의 힘이 너무 커져버렸으며 자연히 이들은 부패했고 관직을 팔았다. 목제파, 고아나굉(高阿那肱), 한장란(韓長鸞)은 북제의 조정을 장악했으며 후주 고위 자신도 궁을 짓고 헐고 짓고를 반복하면서 국고를 비워나갔다. 여름, [[진(육조)|진나라]]의 선제 [[진욱]]은 오명철(吳明徹)에게 군사를 주어 장강을 건너 북제를 공격하게 했는데 고위는 공격받는 지방을 보강하려 했지만 충분하지 않았고, 진나라의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었다. 위파호(尉破胡), 장손홍략(長孫洪略)을 보내 막았지만, 오명철의 진나라 군대에 패배했고 이에 왕림을 수양(壽陽)으로 보내 막게 했다. 하지만 왕림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곧 수양이 함락됐으며 왕림은 사로잡혀 처형당했다. 이렇게 되면서 북제는 장강과 회하(淮河) 사이의 지역을 진나라에게 빼앗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제파와 한장란 등은 여전히 흥청망청 살고 있었다. > 목제파 : 우리가 황하 이남의 땅을 빼앗긴다 해도 구자(龜茲)(신장)에서 살 수 있다! > 한정란 : 것보다 더 비참한 것은 사람답게 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조금을 살아도 즐기며 살 것이다. 겨우 수양 땅이 무슨 대수겠는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