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은(시인) (문단 편집) == 생애 ==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3년[* 일본의 연호로는 쇼와 8년이다. 이 해에 미국이 [[금주법/미국|금주법]]을 철폐하고 [[히틀러]]가 독일의 총리가 되어 권력을 획득했다.] [[군산]] 미룡동 용둔마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일제 말기에 창씨개명한 이름은 '타카바야시 토라스케(高林虎助)'였다. 훗날 고은은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존경받아야겠어요. 우리가 아는 그 시절의 작가들이 대부분 조선 이름을 썼던 게 아닌가 하는데요?"라는 질문을 받자 [[최남선]], [[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예를 들며 반박하기도 했다. 군산고등보통학교(군산고등학교)에 다닐 때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했다. 6.25때 고은의 일가친척들은 대부분 좌익 활동을 했으며 당숙은 인민위원장이었다. 고은 일가는 6.25 당시 용둔리 일대의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고, 이 때문에 마을 사람들과 원수 사이가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퇴각하자 고은은 군산에서 도피하여 [[선유도]]로 피신했다. 이후 중공군이 참전하여 [[1.4 후퇴]]로 국군과 UN군이 밀려나자 선유도에서 나와 군산으로 돌아왔다. 당시 무성 영화의 변사(당시의 성우 겸 나레이터)를 하려 했으나 처음 상영회에서 너무 떨어 잘린 적도 있다고 한다. 또 인맥을 통해 군산북중학교에서 잠깐 교사 활동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국군과 UN군이 다시 재반격을 시작하여 치고 올라가자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했다. 6.25 도중에 '고은'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1951년 봄에는 두 차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때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 고막이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다 6.25 전쟁 중이던 [[1951년]][* 출가한 시기에 대해서 1952년이라는 기록도 있는데, 일단 고은 본인의 인터뷰와 최측근 신경림이 저술한 <고은 문학의 세계>(1993)에는 1951년이라고 한다.]에 군산 [[동국사]]에서 기승(奇僧) 혜초(慧超)를 은사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승려 생활을 하면서 참선과 수양을 거듭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는 승려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폭음을 일삼았다고 거리낌없이 말하기도 했다. [[1953년]]에는 혜초 스님에게 소개받아 경남 통영 미륵섬 미래사를 찾아가 당시 불교계에서 가장 명성 높은 고승 [[효봉]]의 제자가 되었는데, 고은의 삶에서 '효봉 스님의 제자'란 칭호는 두고 두고 이름값이 되었다. 고은이 승려 시절에 [[법명]]을 받은 과정이 불확실하다. 어디에서는 고은이 처음 은사로 모신 혜초로부터 중장(中藏)이란 법명을 받았는데, 나중에 효봉의 제자가 된 뒤 일초(一超)란 법명을 다시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는 혜초가 처음부터 '일초'란 법명을 주었고, '중장'은 혜초의 법호[* 승려가 법명과 별개로 쓰는 다른 호칭. 법랍이나 지위가 어느 정도 되었을 때 은사 승려나 큰승으로부터 받는다. 법호를 받은 승려에게는 법호로 부름이 예의라고 한다.]였다고 한다. [[1957년]] 효봉이 초대 [[조계종]] 총무원장으로 추대되자 스승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1960년〈[[불교신문]]〉을 창간하고 [[법정(승려)]]과 함께 주필로 활동했다. [[1958년]] 11월 〈현대시〉에 [[조지훈]]의 추천으로 〈폐결핵〉이, [[서정주]]의 추천으로〈천은사운〉 〈봄밤의 말씀〉, 〈눈길〉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1960년]] 첫 시집 〈피안감성〉(彼岸感性)을 냈다. [[1962년]] 종단의 징계를 받아 승복을 벗고 [[환속]]했다. 징계 사유는 당시에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훗날 고은은 4.19 혁명 정신에 자극을 받아 승단의 개혁을 주장했다가 종단의 정치보복성 징계를 받은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도 나와 있듯이 고은의 환속은 성추문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https://www.youtube.com/watch?v=ElecQaTVEH0|#]] 또한 종단의 최고 어른이 자신의 스승 효봉이었기 때문에 고은이 정치적인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주장은 그리 설득력이 높지 않다. 환속 이후 1963년 봄 고은은 목포에서 제주도로 가는 배에서 그의 생애에서 세 번째로 자살 시도를 했으나 실패했다. 자신을 물속에 수장시킬 큰 돌과 로프를 가방 속에 숨기고 제주행 배를 탔다가 술을 마시고 잠든 후 깨어보니 제주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고은은 1963년부터 1968년까지 4년여 동안 제주도에 거처를 마련하고 은거 생활을 했다고 한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734396|#]] [[http://www.kimgwanhoo.net/wordpress/2009/03/30/%EC%8B%9C%EC%9D%B8-%EA%B3%A0%EC%9D%80%EA%B3%BC-%EC%A0%9C%EC%A3%BC%EB%8F%84/|#]] 1968년 제주도에서 가짜 고은 사건이 터졌다. 고은을 사칭한 '가짜 고은'이 지역 유력자의 딸과 사기 결혼을 했다는 것. [[1968년]] 수필집 〈인간은 슬프려고 태어났다〉를 냈는데, 수필집에서 '''자기 스스로를 '성(聖) 고은'이라고 신격화'''하여 사회적 이목을 끌었다. [[1970년]] 짧은 시집 〈세노야〉를 펴낸 뒤, 한동안 작품을 내지 않고 번역가로 활동했다. 이무렵 고은은 북한산 계곡에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 시도를 했다가 근처에서 훈련하던 예비군들이 그를 발견하고 병원으로 옮겨져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등단 이후 1970년까지 발표된 그의 시들은 허무의 정서, 생에 대한 절망,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탐닉이 주를 이루고 있다. 당시 그를 두고 흔히 '''허무의 시인'''이라고 불렀다. 그 뒤 1974년부터 그의 시는 경향이 크게 달라지게 된다.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 이후 시대상황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투쟁 의지를 적극적으로 담는 저항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1970년대 중반부터 갑자기 성향이 완전히 바뀐 것에 대해 고은 본인은 "이쪽으로 흐르던 물이 다른 쪽으로 급격하게 돌아서 흐르기 시작한 것"에 비유했다. 이후 그는 1970년대 최고의 저항 시인으로 꼽히게 되면서 반독재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대한민국]] 최초의 진보 문인 단체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창설하여 활동한것도 이때다. (아래 항목 참조) [[1983년]] 중앙대학교 영어과 교수 이상화와 결혼한 뒤 그의 나이 50세에 딸 차령을 얻었다. 부인의 직장이 있는 중앙대학교 안성캠퍼스에서 멀지 않은 안성 대림동산 전원주택 단지에 살았다.[* 당시 주례는 [[함석헌]]이었다. 이 결혼이 재혼인지는 알 수 없다.] 2013년 수원시의 구애로 안성을 떠나 수원 [[광교산]] 자락으로 이주했다. 이에 광교산 일대 주민들이 특혜 및 혈세 낭비라는 이유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5&aid=0002719004|시위]]를 하며 논란이 되었다. 아마 본인들 거주지 주변의 개발제한구역 해제를 위해 애먼 고은을 타겟으로 삼은 듯 한데 성격 상 수원을 떠날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수원시 측에선 난감하게 여겼다. 그리고 실제로 떠나게 되면서 주민들은 욕을 엄청 먹'''었'''다. 상세한 내용은 아래 논란 문단을 참조. 참고로 저 구역은 장안구 상, 하 광교동으로 영통구에 속한 광교신도시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