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은(시인) (문단 편집) === 반독재, 반미 운동 === 고은은 1974년 저항시집 <'''문의 마을에 가서'''>을 발표한다. 이어 고은은 저항문학인들을 결집하여 1974년 11월 18일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만들어 초대 대표에 취임했다. 이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현재까지 두 차례 이름을 바꾸면서 저항문학계열을 대표하는 단체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고은은 계속해서 그 중심에 있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는 민주화 열기가 한창이던 [[1987년]] [[9월 17일]] ''''민족문학작가회의''''로 확대 재창단하였고, 다시 [[2007년]] [[12월 8일]] ''''한국작가회의''''로 명칭을 바꾸고 [[도종환]]을 사무총장에 선출하면서 현재에 이른다. 고은이 중심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 문학의 대부 [[백낙청]]의 지원으로 인한 것이었고 백낙청의 묵인으로 인해 한국 문단이 문제점을 숨기고 문단 권력에 아부해야만 등단할 수 있는 기형적인 구조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이는 훗날 고은 본인이 성폭력 가해자로 몰락하면서 백낙청의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청렴한 문학가라는 겉으로 공고하던 위상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는 단초가 된다. [[이문열]] 등은 1970년대 초중반 고은의 성추문이 수면 위로 떠오르며 지탄을 받자 순수문학을 하던 그가 갑자기 저항시인으로 돌변했다고 말한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후 고은은 당시 순수 문학계에 대해 현실 참여를 하지 않는 가짜 문인들이라고 비판했다. 참고로 1970년대 초 고은의 성폭력 문제를 거론한 시인들이 주로 순수문학계였다고 한다. 저항시인으로 변모한 고은은 [[김지하]]구출위원회 부위원장([[1974년]]), 민주청년협의회 고문([[1978년]]),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초대 부회장([[1978년]])으로 활동했다. [[1979년]] [[6월]]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의 방한 반대운동을 주도하다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으로 투옥되어 [[1979년]] 말 석방되었다. 그동안 6.25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우방인 미국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운동이 없었기 때문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훗날 고은은 1979년 카터 방한 반대운동이 국내 '''[[반미]] 운동의 효시'''가 된 사건이었다고 자평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고은이 주도한 카터 방한 반대운동은 5.18 이전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이지만, 이 사건이 국내 반미 운동의 효시였다고 말하는건 명백한 과장이다. 여기서도 고은 인생을 관통해 나타나는 자뻑 기질이 보인다.][* 반미의 무풍지대라던 대한민국에서 1980년대에 갑자기 [[반미]] 정서가 폭발한 것은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신군부의 유혈 진압을 미국이 묵인 혹은 방조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연루 혐의로 다시 투옥되어 복역했다.[* 옥살이하면서 감방에서 소일거리로 국어사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나중에는 아예 '''국어사전을 달달 외우는 경지'''까지 올랐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그러나 평소 좋지 않았던 귀 건강이 악화되어[* 6.25 때 도피 생활을 하면서 두 차례 자살 시도를 했는데, 그때 귀에 청산가리를 부어 귀가 손상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또다른 일설에 의하면 성추문 관련하여 죽도록 얻어맞아 고막이 터진 것이라고 한다.] 옥중에서 귀 수술을 받고 얼마 후인 1982년 8·15 특사로 풀려났다. [[1987년]] [[9월 17일]], 이미 1974년 자신이 창설한 '자유실천문인협의회'를 확대 개편하여 '민족문학작가회의'로 재창단했다. 이후 고은은 이 단체에서 의장, 부회장 등을 지냈다. 같은 해에는 음악, 미술, 공연, 문학 등 진보적 문화예술계 전체를 아우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을 창설하여 초대 공동의장을 맡았다. [[1989년]] [[1월]] [[한겨레신문]]에 ‘[[무아마르 카다피]] 대령에게’라는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01150028910100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9-01-15&officeId=00028&pageNo=1&printNo=210&publishType=00010|칼럼]]을 썼는데 이 칼럼 내용이 논란이 되었다. 이 칼럼에서 고은은 악명 높은 독재자 카다피를 옹호하고, 미국을 맹비난했다. 고은은 칼럼에서 '''[[리비아]]가 [[팬암 103편 폭파 사건|테러를 저지르는 것]]은 미국 탓'''이라는 맹목적 반미주의 입장의 논지를 밝혔다. '''미국에 대항하는 국가들은 모두 자유를 지향하는 혁명 국가들이며''' 미국이 ‘세계 경찰국가’의 못된 패권으로부터 그들 자신의 도덕을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인 [[팀스피리트]] 훈련이 동아시아 긴장 완화에 크게 해로운 것이 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은 매년 훈련기간마다 팀스피리트 훈련을 공세적 훈련이라고 비난했다.] 외교관계를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지만 고은은 리비아가가 미국에 반항하기 때문에 정의로운 국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인 반미주의를 근거로 두고 칼럼을 작성했기 때문에 비난을 받았다. 당시 [[반미]]가 기본이던 운동권에서도 리비아가 반미 국가라고 해서 무고한 민간 여객기를 폭파한 사건을 대놓고 옹호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다만 '진짜 리비아가 한게 맞느냐?' 같은 음모론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는 정도였다. [[1989년]] 고은은 [[문익환]]의 방북과 동시에 진보계열 문학인들의 방북을 추진했다. 고은은 남북작가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3월 중순 북한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와 교섭하여 [[3월 27일]] 남북 작가 회의 회담을 주최하기로 합의했다. 그리하여 27일 고은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대표단 5명을 데리고 판문점으로 향했으나 경찰에 저지되고 말았다. 이에 고은, [[신경림]] 등 '민족문학작가회의' 소속 회원 26명이 서울마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89/1820388_19354.html|당시 뉴스 보도 화면.]] 당시 조사를 받은 26명 가운데 25명은 조사 후 풀려났으나 고은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4월 3일]] 구속 수감되었다. [[http://db.kdemocracy.or.kr/isad/view/0071978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