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은아(1946) (문단 편집) == 생애 == 영화배우가 될 줄은 생각도 못할 정도로 조용하고 평범한 학창시절을 보냈다. 사업가였던 부친이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서대문 쪽에 위치했던 동양극장을 경영하기는 했지만, 부산에서 거주하던 그녀는 그 곳에 방학 때나 되어야 가는 것이 전부였다. 그나마 같은 학과 친구들 작품의 두상모델을 해주었던 것이 학창시절의 특이한 경험의 전부였다고 한다. 1964년 당시 최고의 톱스타 [[신성일]]과의 결혼으로 역시 인기절정이었던 [[엄앵란]]은 사실상 은퇴를 하게 되었다. 이에 영화계에는 [[엄앵란]]의 뒤를 이을 새 얼굴이 필요하게 되었고 학교에서 두상모델을 하던 청순한 여대생 이경희를 '난의 비가'의 여주인공으로 급하게 캐스팅한다. 이 때 극작가 [[한운사]] 선생이 '참 고운 아이' 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고은아라는 이름을 지어주었고, 그렇게 여대생 이경희는 ‘'난의 비가' 의 주연 여배우 고은아로 정식으로 데뷔하게 된다. 이 때가 1965년. 사실 얼떨결에 영화계에 데뷔는 했지만 딱히 배우의 길은 생각하지 않았던 고은아는 연이은 작품의 성공으로 순식간에 톱스타로 자리매김하였고, 1966년 제4회 청룡영화상에서 당시 인기배우였던 태현실을 밀어내고 1위로 인기여우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또래의 [[남정임]], [[문희]]와 함께 큰 사랑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청초한 이미지로 사랑받던 고은아는 1967년 그녀의 나이 22살에 다소 이른 결혼을 한다. 상대는 합동영화사의 사장 [[곽정환(영화제작자)|곽정환]]. 단신으로 월남하여 영화사를 설립,성공가도를 달리던 곽정환은 고은아에게 적극적으로 구애, 두 사람은 15살의 나이 차이를 극복하고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결혼 후에는 영화 출연을 줄이고 주로 TV에서 활동하였다. [[동양방송]]의 '사모곡'에서 맡았던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와 [[문화방송]]의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에서 맡았던 [[육영수]] 여사 역할은 올드팬들 사이에서 지금까지도 회자가 되고 있다. 80년대까지는 조미료 [[미원(조미료)|미원]]의 모델로 장수하였고[* 당시 경쟁사인 삼성 계열 제일제당에서는 같은 글루타민산나트륨 성분 조미료인 미풍 모델로 [[김혜자]]가 활약하며 경쟁 구도를 이루었는데, 다시다가 나올 때까지 미원을 넘어서지 못했다.] TV드라마 [[제2공화국(드라마)|제2공화국]]의 출연도 하였지만, 이후 TV나 영화 출연이 없다. 1987년 1월, 고향인 부산 서면에 본인 이름을 딴 '은아극장'을 개관하여 사장으로 취임한다. 남편 곽정환 서울극장 회장이 2013년 별세한 이후에는 '서울극장'의 대표와 행복한 나눔 이사장으로만 활동하고 있다. 2015년 [[부산국제영화제]]에 1억을 기부하기도 하였다. 이후 2021년 11월에는 아들인 곽승남 서울극장 대표가 암으로 별세하면서 [[참척]]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